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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국인은 625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3, 끝)
2010. 07. 02. 금요일
아홉친구
세 번째로 거론해볼 주장은 중국이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다. 지난 번 연재의 댓글에 조선족 분이 이를 ‘축구에서 중국이 브라질과 1:1로 비겨 나름 승리했다고 여기는 것’에 비유하셨는데, 실로 딱 맞는 표현이었다. 우선 콩 교수의 글을 보자.
학생들이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승리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나는 말했다. 무엇이 승리인가? 군사학에서 말하는 전쟁의 승리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전쟁의 목적을 달성했는가, 또 하나는 그 대가가 지나치게 크지 않았는가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목적은 바로 미군이 38선 밑으로 돌아가는 것, 북조선의 독립 회복, 중국의 평화적 건설 유지였다. 이러한 목적은 모두 달성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목적 달성은 절반에 불과했다. 치른 대가를 놓고 보면, 사람, 금전, 물자 어느 방면에서든 상대보다 또 예상보다 적었다. 미군이 전쟁 중 소모한 작전 물자는 7300여만 톤이고, 전비는 830억 달러를 넘었다. 이에 비해 중국과 인민군은 560여만 톤의 물자를 소모했고 전비는 62억5천만 위안이었다. 전국 5억 인구로 따지면 평균 12위안 정도니까, 중국의 경제 건설에는 그다지 영향이 없었다.
또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도 있는데, 그건 중국 인민의 믿음이며, 백년에 걸친 중국의 치욕을 씻어냈다는 데 있다. 고취된 애국심은 거대한 생산력으로 전화되었고, 국민 경제의 회복을 대대적으로 촉진시켰으며, 동북 지역은 국가 건설의 총기지가 되어 중국 공업화의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중국은 대국의 국제적 지위를 회복했고 중국인도 국제 사회에서 어깨를 펼 수가 있었다. 싱가폴의 전 총리 리콴유(李光耀)는 이렇게 회고했다. 한국전쟁 이전에 그가 유럽 여행을 하면 곳곳에서 눈총을 받았는데, 중국이 조선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는 유럽 세관원도 중국인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더란 것이다. 리콴유는 그때부터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니 중국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객관적인 지표상, 한국전쟁에서 전승국은 없다. 하지만 승리를 주장하는 쪽은 북한과 중국이며, 미국은 말이 없다. 미국 역사상,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협상에 응해야 했던 전쟁은 한국전쟁이 처음이었다. 정전협정에 서명한 당사자는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겸 미 육군대장 마크 W. 클라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세 명이다.
설사 중국의 승리 주장이 못마땅하다 한들, ‘한국 승리’는 애당초 성립되지도 않는 환상에 불과하다. 정전협정의 서명국에 한국이 없는 이유는 연합군에 포함됐기 때문이며 협상주체의 실질적인 의미를 따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렇다 해도, 1958년 중국이 북한에서 완전 철수하고 정전협정 행사 권리를 양도한 것에 비하면 초라해질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빌고 빌어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양도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다 아시겠지만, 6월 27일 이명박 대통령은 오바마 미 대통령과 회담을 하여 2012년 4월로 예정된 전시작전권 양도를 2015년 11월로 연기했다).
중국은 한국전쟁의 참전국이자 정전협정 서명국으로서, 최소한 왈가왈부할 자격이 있다. 그리고 미국을 적으로 두어 패하지 않았다고 하면, 1950년대든 지금이든 ‘승리’라고 자찬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세부사항으로 들어가면 콩 교수의 글에도 있듯이, 중국이 미국보다 많은 물자를 소요했을리 만무하다. 그리고 중국의 참전 목적이 ‘미국의 회군’과 ‘북조선의 독립’에 있지 ‘남한 지역의 정복’에 있지 않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
1951년 1월 서울을 재점령한 후, 사령관인 펑더화이와 김일성 사이에 격한 논쟁이 있었다는 야사는 이제 꽤 알려져 있다. 김일성은 기세를 탄 중국이 계속 남진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미군의 예봉을 꺾어 후퇴시키긴 했으나, 진짜 전력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판단했다. 남북한을 둘러싼 어느 정도의 묵계, 즉 38선을 기준으로 한 예전의 대치 상태를 넘어서게 되면, 필경 미군의 전면적인 반격을 자초할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은 그때 이미 원자폭탄의 사용 여부를 검토하고 있었으니, 진군을 멈춘 펑더화이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갈등이 고조됐다. 결국엔 스탈린이 펑더화이의 판단을 지지하면서 김일성도 더 이상 진군을 주장할 수 없었다.
중국이 평화 애호의 차원에서 진군을 멈추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한을 차지하고자 했던 건 김일성이지 중국은 아니다. 남진해봤자 어차피 남 좋은 일 해줄 뿐이며 중국엔 소득이 없다. 이에 비해 초래될 위험성, 미국과의 진짜 전면전은 중국의 국운을 위태롭게 할 수 있었다. 지원군의 참전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면, 진군을 멈춘 것도 중국의 소득과 리스크를 따진 ‘어쩔 수 없었던’ 결정이라고 봐야겠다. 하지만 설명이 다르더라도, 중국의 목적이 남한 정복에 있지 않았다는 말 자체는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열차를 타고 철수하는 중공군들. 조선(북한)인들의 환송을 받고 있다.
사실 이보다 중요하고 뚜렷한 증거는 앞서 말한 1958년 중국 지원군의 북한 철수다. 이로써 중국은 남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으며, 목적이 오직 방어에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떳떳이 펼 수 있게 되었다. 종합해보면 중국이 미국에 맞서 싸워내면서도 지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북조선의 독립 유지’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중국이 전쟁의 목적을 달성했고 이를 토대로 승리를 주장하는 것이 근거 없는 거짓말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 논리는 북한에서도 채택하여 ‘조국해방전쟁의 승리’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경우엔 얘기가 다르다. 중국이야 도와준 입장이니까 그런 얘기도 할 수 있지만, 북한은 그들이 말하는 ‘침략자 미제’가 남한에 개입하도록 전면전을 일으킨 당사자다. 남한에 살고 있는 필자 입장에서 말하자면, 남한이 반세기 넘게 미국의 간섭을 받게 된 원인은 결국 김일성에게 있다. 이승만이 체념하고 바다에 뛰어들었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 게 부자연스러운 행위는 아니었지 않은가.
티격태격하다가 먼저 짱돌을 든 놈이 더 나쁜 거지, 맞고 나서 형 데리고 온 놈이 해괴하다고 할 순 없다. 미국의 간섭이 싫어 ‘반미’를 외치는 게 곧 ‘친북’일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북한이 전쟁 승리를 주장하는 데엔, 정전협정의 서명 당사국이란 명목이 있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 점에선 우리 스스로가 더 바보짓을 했으니 유구무언이다.
하지만 전쟁의 목적과 소요물자를 근거로 한 ‘승리’ 주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를 소위 ‘환산할 수 없는 가치’까지 몰고 가는 건 오버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판단은 그 당시의 상황에 국한되어야 한다. 당시 이승만은 국민을 속이고 한강다리를 끊는, 무능과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줬다. 그렇지만 전쟁 이후 상황까지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운운하며 따지게 된다면,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미국을 혈맹으로 끌어들인 일이야말로 이승만이 한국에 선사한 최대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아니었다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비록 지정학적 요소가 있었다한들 이 약소한 나라에 그렇게 오랫동안 지원을 해주었을까? 2차대전 이후의 신생독립국(근대적 의미에서) 중에서, 유독 한국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최대의 원인은 미국의 전폭적 지원이었다. 한국전쟁 관련국 중 어느 누가 이보다 더 큰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받았는가.
콩 교수가 말하는 “중국은 대국의 국제적 지위를 회복했고 중국인도 국제 사회에서 어깨를 펼 수가 있었다”는 대목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지원군이 미군에 맞서 용맹함이 대단했다고 하자. 그러나 미국에 결정적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었던 원자폭탄을 끝내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물론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군사적으로 볼 때 미국을 꺾었다고 표현하기엔 낯간지러운 일이다. 더 이상의 의미 부여는 과잉포장이라는 거다. 그리고 소련의 지원 이야기는 몰라서 안 한 것인지, 일부러 뺀 것인지 모르겠다. 가령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미그기와 파일럿 교육을 지원하면서도 일부러 소련 군복을 입히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의 미그기로 인해 북위 39도 창천강 이북이 더 이상 미군의 무스탕에 놀아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황상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중국에서는 마치 조선인민군이 패퇴한 후 순전히 자기 힘으로만 미국과 싸운 듯 이야기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6.25 전쟁에 투입된 미그기
전쟁 이후 중국이 얻은 ‘환산할 수 없는 가치’는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중국은 UN군과 싸운 이유로 외교적으론 꽤 오랫동안 고립을 면치 못했다. 1950년 말부터 시작된 지도층의 분열과 숙청, 이후 이어진 문화대혁명으로 얼마나 세계의 조롱거리가 됐는지는 다들 굳게 입을 다문다. 마오이즘이 한때 서방 지식인 사회에서 유행이었던 적이 있고, 그래서 해외 중국인들도 어깨를 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중국이 쭉 승승장구했다면 얘기가 다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중국은 소위 ‘승리의 수확’을 스스로 말아먹었으며, 거대한 생산력의 전화와 경제 회복, 중국의 공업화는 모두 1990년대 들어서나 시작됐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중국은 내국인용의 ‘인민폐’와 외국인용의 ‘외환권(外匯券)’을 따로 운용하던,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1992년 시안(西安) 중심가에는 16차로의 너른 도로가 닦여져 있었으나, 양편 귀퉁이의 1차로만이 차량용이었고 나머지는 자전거용이었다. 그러한 광경이 중국의 치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든 전쟁의 ‘승리자’라는 중국의 공업화가, 정전협정 서명란에도 끼지 못한 한국보다도 늦었다면, 최소한 그걸 갖고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얻었노라고 떠들기엔 민망한 노릇이다.
이 같은 인식이 있는 이유는, 한국전쟁이 가져다 준 중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연장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미국과 맞장 떠서 버텼다는 사실은 중국인 입장에선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후의 역사가, “그리하여 이를 발판으로 삼아 중국은…”으로 문장을 잇지 못하고, “하지만 이후 중국은…”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중국의 1960~80년대는 중국인 스스로 평가하기에도 암울한 세월이었다. 중국에서 만났던 초로(初老)의 중국인은, 문화대혁명 시기를 “붉은 머플러를 한 아이가 길가의 누군가를 이유 없이 쏘아 죽이고, 그래도 아무도 덤비지 못했던, 누구든 간에 일가 친척 한 명은 그때 죽었던” 시절로 묘사했었다. 중국의 암울한 세월이 사회주의 본연의 맹점 때문인지, 마오저둥의 과욕 때문인지, 사인방(四人幇)을 위시한 부패 정치인들 때문인지는 여기서 따지지 말자.
어쨌든 양키와 싸우다 죽었으면 모를까, 사상 정화의 깃발 아래 의미 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놓고 자부심을 얘기할 순 없다. 하지만 급속도로 발전된 지금의 중국에서 느끼는 중국인들의 자부심은 또한 대단하다. 그리하여 어색한 연결이 이루어진다. ‘중국인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중간에 간혹 있는 역사적 사실은 예외와 망각으로 제쳐두고, 괜찮은 것들만 연결시켜 근거를 삼게 되는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우리는 승리했다’라는 인식은 곧바로 현재의 발전된 중국과 연결되어 ‘거대한 생산력’ ‘국민경제 회복’ ‘대국으로서의 지위’로 이어진다. 그 사이에 있는 암울함은 고려치 않거나 망각된다. 사실 이는, 이전에 지적했던 ‘중국이 역사적으로 조선반도에 개입한 4번의 사례’에도 해당된다. 여기서 대전제는 ‘중국은 늘 이땅을 도왔으며 운명공동체와 같았다’는 것이며, 여기에 위배되는 역사적 사례(병자호란 같은)는 처음엔 의도적으로 배제되나, 나중에는 정말로 망각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역사 왜곡의 시발점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사실이 아니니 왜곡은 왜곡이겠으나, 그 기초는 암울했던 지난날을 뿌리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지, 남을 업신여기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이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의 경우를 보면 되겠다. 공자, 창힐(처음 한자를 고안했다는 인물)이 동이족이었다거나 백제의 영토가 실은 중국 본토까지 뻗쳐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환단고기를 철석같이 믿는 이들의 주장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개인적으론 믿지 않는다), 이 주장들의 시작이 우리 민족의 힘을 일깨우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을 업신여기고자 하는 마음이 그 출발은 아니다(라고 믿는다). 왜 그런 마음이 생겼는가, 답은 뻔하다. 우리의 지난 날이 암울했기 때문이다.
설령 고구려가 중국 중원까지 쳐들어가 호령했다 한들, 왜국의 문명은 전부 한반도에서 건너갔다 한들 그것들이 현재의 우리를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당신의 조부모가 잘 살았다고 하여 가난한 당신이 곧 부자는 아니듯이. 그러나 그 엄청난 시간의 왜곡을 뚫고 사람들이 민족 자긍심의 횃불에 쉽게 스스로를 불태우게 되는 건, 현재 우리는 어떻게든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위대하다’는 전제를 채택하고 그에 맞추어 역사를 해석해버리기 때문이다.
중국인의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것이 성찰없이 진행될 때다. 자신의 암울한 시절을 뿌리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으니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것이 허위의식임을 지적당한 후에도 뿌리치지 못한다면 필경 자국 위주의 역사왜곡으로 치닫는다.
요약해보자.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했다는 주장이 타당할지라도, 이를 중국인의 자부심으로 연결시키는 과정에서는 ‘왜곡’이 개입하며, 그 왜곡은 우리도 공감할 수 있는 암울한 세월에서 연원한다. 이것을 비판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필자에게 그 ‘비판의 방법’을 묻는다면, 오히려 ‘칭찬’이 가장 좋은 비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역시 개인적인 경험이다. 중국 어느 소도시의 공무원과 단 둘이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그는 약간은 술에 취해서, 중앙정부를 비판하다가 나중엔 티베트 독립을 찬성하더니, 급기야 “이럴 바엔 중국은 분열되는 편이 낫다”는 얘기까지 했다. 중국인 입에선 정말 듣기 힘든 말이다. 그는 정부 관리들이 하나같이 부패해서 저들끼리 해처먹고 있다며 지도층을 맹비판했다. 그땐 필자도 조금 취했는데, 그래서인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중앙이 없었다면 지금 중국은 어떻게 됐겠는가. 공산당에 문제가 있다는 건 맞다. 그렇다고 그때 공산당과 대항한 군벌들이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이었나. 최소한 초기의 마오저둥, 저우언라이에겐 개혁의 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인민의 지지를 얻었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는가.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겠지만 중앙정부가 강한 권력을 잡은 데엔 그만한 역사적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그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아마 우리가 어느 외국인에게, 민주화를 이뤄냈다고는 하지만 현실의 결과물이 개똥 같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는데, 그가 오히려 한국 민주화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해주었을 경우, 당신이 느낄 그것과 비슷한 무언가를 그 중국인도 느꼈을 것이다.
중국인의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건 오히려 쉽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원하는 건 그들과의 다툼이 아니라 교류가 아니었던가. 한중일 국민들은 공통적으로 겸양의 덕을 알고 있다. 내가 ‘우리는 위대하다’라고 외칠 때, 정작 나를 겸연쩍게 만드는 건 그들의 비판이나 비꼼이 아니라, ‘맞어 너희는 위대해’라고 맞장구쳐줄 때다. ‘한국축구는 강하다’고 선언하는 마당에 일본 사람이 ‘맞어 한국은 강해’라고 화답해주면, 일면 뿌듯하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꼭 그렇지는 않은데…’라며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지 않던가.
이제 마무리하자. 중국인의 625에 대한 인식을 고찰해보면 그들의 주장에 나름 일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우리가 가진 인식과 다르다는 점에서 새삼 역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그 사실들을 기초로 하여 재생산된 중국인의 인식에는 지적할만한 문제가 있다. 625가 내전이라는 주장을 기초로 하여 남북한의 지위가 폄하되었다. 중국의 개입이 부득이했다는 주장에선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심리가, 또 중국의 승리를 평가하면서는 중국인의 자부심을 앞세우려는 태도가 있었다.
역사학과 정치외교학의 차원에서는 아마 더욱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될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중국인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앞서 수 차례 강조했듯이, 잘못된 인식이 생겨난 근원을 따져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그 연원에는 누구나 공감할만한 심리가 있다. 그들의 심리를 공감하고 긍정적인 면에 주목해야 우리는 선한 얼굴의 중국인을 만날 수 있다. ‘짱꼴라’와 ‘棒子’의 관념에 갇히게 되면 서로에게 돌아오는 건 악담뿐일 것이다.
거창한 얘기로 끝내니 딴지스럽지가 않은데, 진심이 그러하니 다른 표현이 어렵다. 이해 바란다.
딴지중국통신원 아홉친구
원글주소 http://www.ddanzi.com/news/33481.html
[역사] 중국인은 625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3, 끝)
2010. 07. 02. 금요일
아홉친구
세 번째로 거론해볼 주장은 중국이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다. 지난 번 연재의 댓글에 조선족 분이 이를 ‘축구에서 중국이 브라질과 1:1로 비겨 나름 승리했다고 여기는 것’에 비유하셨는데, 실로 딱 맞는 표현이었다. 우선 콩 교수의 글을 보자.
학생들이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승리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나는 말했다. 무엇이 승리인가? 군사학에서 말하는 전쟁의 승리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전쟁의 목적을 달성했는가, 또 하나는 그 대가가 지나치게 크지 않았는가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목적은 바로 미군이 38선 밑으로 돌아가는 것, 북조선의 독립 회복, 중국의 평화적 건설 유지였다. 이러한 목적은 모두 달성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목적 달성은 절반에 불과했다. 치른 대가를 놓고 보면, 사람, 금전, 물자 어느 방면에서든 상대보다 또 예상보다 적었다. 미군이 전쟁 중 소모한 작전 물자는 7300여만 톤이고, 전비는 830억 달러를 넘었다. 이에 비해 중국과 인민군은 560여만 톤의 물자를 소모했고 전비는 62억5천만 위안이었다. 전국 5억 인구로 따지면 평균 12위안 정도니까, 중국의 경제 건설에는 그다지 영향이 없었다.
또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도 있는데, 그건 중국 인민의 믿음이며, 백년에 걸친 중국의 치욕을 씻어냈다는 데 있다. 고취된 애국심은 거대한 생산력으로 전화되었고, 국민 경제의 회복을 대대적으로 촉진시켰으며, 동북 지역은 국가 건설의 총기지가 되어 중국 공업화의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중국은 대국의 국제적 지위를 회복했고 중국인도 국제 사회에서 어깨를 펼 수가 있었다. 싱가폴의 전 총리 리콴유(李光耀)는 이렇게 회고했다. 한국전쟁 이전에 그가 유럽 여행을 하면 곳곳에서 눈총을 받았는데, 중국이 조선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는 유럽 세관원도 중국인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더란 것이다. 리콴유는 그때부터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니 중국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객관적인 지표상, 한국전쟁에서 전승국은 없다. 하지만 승리를 주장하는 쪽은 북한과 중국이며, 미국은 말이 없다. 미국 역사상,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협상에 응해야 했던 전쟁은 한국전쟁이 처음이었다. 정전협정에 서명한 당사자는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겸 미 육군대장 마크 W. 클라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세 명이다.
설사 중국의 승리 주장이 못마땅하다 한들, ‘한국 승리’는 애당초 성립되지도 않는 환상에 불과하다. 정전협정의 서명국에 한국이 없는 이유는 연합군에 포함됐기 때문이며 협상주체의 실질적인 의미를 따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렇다 해도, 1958년 중국이 북한에서 완전 철수하고 정전협정 행사 권리를 양도한 것에 비하면 초라해질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빌고 빌어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양도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다 아시겠지만, 6월 27일 이명박 대통령은 오바마 미 대통령과 회담을 하여 2012년 4월로 예정된 전시작전권 양도를 2015년 11월로 연기했다).
중국은 한국전쟁의 참전국이자 정전협정 서명국으로서, 최소한 왈가왈부할 자격이 있다. 그리고 미국을 적으로 두어 패하지 않았다고 하면, 1950년대든 지금이든 ‘승리’라고 자찬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세부사항으로 들어가면 콩 교수의 글에도 있듯이, 중국이 미국보다 많은 물자를 소요했을리 만무하다. 그리고 중국의 참전 목적이 ‘미국의 회군’과 ‘북조선의 독립’에 있지 ‘남한 지역의 정복’에 있지 않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
1951년 1월 서울을 재점령한 후, 사령관인 펑더화이와 김일성 사이에 격한 논쟁이 있었다는 야사는 이제 꽤 알려져 있다. 김일성은 기세를 탄 중국이 계속 남진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미군의 예봉을 꺾어 후퇴시키긴 했으나, 진짜 전력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판단했다. 남북한을 둘러싼 어느 정도의 묵계, 즉 38선을 기준으로 한 예전의 대치 상태를 넘어서게 되면, 필경 미군의 전면적인 반격을 자초할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은 그때 이미 원자폭탄의 사용 여부를 검토하고 있었으니, 진군을 멈춘 펑더화이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갈등이 고조됐다. 결국엔 스탈린이 펑더화이의 판단을 지지하면서 김일성도 더 이상 진군을 주장할 수 없었다.
중국이 평화 애호의 차원에서 진군을 멈추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한을 차지하고자 했던 건 김일성이지 중국은 아니다. 남진해봤자 어차피 남 좋은 일 해줄 뿐이며 중국엔 소득이 없다. 이에 비해 초래될 위험성, 미국과의 진짜 전면전은 중국의 국운을 위태롭게 할 수 있었다. 지원군의 참전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면, 진군을 멈춘 것도 중국의 소득과 리스크를 따진 ‘어쩔 수 없었던’ 결정이라고 봐야겠다. 하지만 설명이 다르더라도, 중국의 목적이 남한 정복에 있지 않았다는 말 자체는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열차를 타고 철수하는 중공군들. 조선(북한)인들의 환송을 받고 있다.
사실 이보다 중요하고 뚜렷한 증거는 앞서 말한 1958년 중국 지원군의 북한 철수다. 이로써 중국은 남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으며, 목적이 오직 방어에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떳떳이 펼 수 있게 되었다. 종합해보면 중국이 미국에 맞서 싸워내면서도 지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북조선의 독립 유지’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중국이 전쟁의 목적을 달성했고 이를 토대로 승리를 주장하는 것이 근거 없는 거짓말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 논리는 북한에서도 채택하여 ‘조국해방전쟁의 승리’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경우엔 얘기가 다르다. 중국이야 도와준 입장이니까 그런 얘기도 할 수 있지만, 북한은 그들이 말하는 ‘침략자 미제’가 남한에 개입하도록 전면전을 일으킨 당사자다. 남한에 살고 있는 필자 입장에서 말하자면, 남한이 반세기 넘게 미국의 간섭을 받게 된 원인은 결국 김일성에게 있다. 이승만이 체념하고 바다에 뛰어들었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 게 부자연스러운 행위는 아니었지 않은가.
티격태격하다가 먼저 짱돌을 든 놈이 더 나쁜 거지, 맞고 나서 형 데리고 온 놈이 해괴하다고 할 순 없다. 미국의 간섭이 싫어 ‘반미’를 외치는 게 곧 ‘친북’일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북한이 전쟁 승리를 주장하는 데엔, 정전협정의 서명 당사국이란 명목이 있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 점에선 우리 스스로가 더 바보짓을 했으니 유구무언이다.
하지만 전쟁의 목적과 소요물자를 근거로 한 ‘승리’ 주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를 소위 ‘환산할 수 없는 가치’까지 몰고 가는 건 오버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판단은 그 당시의 상황에 국한되어야 한다. 당시 이승만은 국민을 속이고 한강다리를 끊는, 무능과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줬다. 그렇지만 전쟁 이후 상황까지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운운하며 따지게 된다면,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미국을 혈맹으로 끌어들인 일이야말로 이승만이 한국에 선사한 최대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아니었다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비록 지정학적 요소가 있었다한들 이 약소한 나라에 그렇게 오랫동안 지원을 해주었을까? 2차대전 이후의 신생독립국(근대적 의미에서) 중에서, 유독 한국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최대의 원인은 미국의 전폭적 지원이었다. 한국전쟁 관련국 중 어느 누가 이보다 더 큰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받았는가.
콩 교수가 말하는 “중국은 대국의 국제적 지위를 회복했고 중국인도 국제 사회에서 어깨를 펼 수가 있었다”는 대목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지원군이 미군에 맞서 용맹함이 대단했다고 하자. 그러나 미국에 결정적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었던 원자폭탄을 끝내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물론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군사적으로 볼 때 미국을 꺾었다고 표현하기엔 낯간지러운 일이다. 더 이상의 의미 부여는 과잉포장이라는 거다. 그리고 소련의 지원 이야기는 몰라서 안 한 것인지, 일부러 뺀 것인지 모르겠다. 가령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미그기와 파일럿 교육을 지원하면서도 일부러 소련 군복을 입히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의 미그기로 인해 북위 39도 창천강 이북이 더 이상 미군의 무스탕에 놀아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황상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중국에서는 마치 조선인민군이 패퇴한 후 순전히 자기 힘으로만 미국과 싸운 듯 이야기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6.25 전쟁에 투입된 미그기
전쟁 이후 중국이 얻은 ‘환산할 수 없는 가치’는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중국은 UN군과 싸운 이유로 외교적으론 꽤 오랫동안 고립을 면치 못했다. 1950년 말부터 시작된 지도층의 분열과 숙청, 이후 이어진 문화대혁명으로 얼마나 세계의 조롱거리가 됐는지는 다들 굳게 입을 다문다. 마오이즘이 한때 서방 지식인 사회에서 유행이었던 적이 있고, 그래서 해외 중국인들도 어깨를 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중국이 쭉 승승장구했다면 얘기가 다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중국은 소위 ‘승리의 수확’을 스스로 말아먹었으며, 거대한 생산력의 전화와 경제 회복, 중국의 공업화는 모두 1990년대 들어서나 시작됐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중국은 내국인용의 ‘인민폐’와 외국인용의 ‘외환권(外匯券)’을 따로 운용하던,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1992년 시안(西安) 중심가에는 16차로의 너른 도로가 닦여져 있었으나, 양편 귀퉁이의 1차로만이 차량용이었고 나머지는 자전거용이었다. 그러한 광경이 중국의 치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든 전쟁의 ‘승리자’라는 중국의 공업화가, 정전협정 서명란에도 끼지 못한 한국보다도 늦었다면, 최소한 그걸 갖고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얻었노라고 떠들기엔 민망한 노릇이다.
이 같은 인식이 있는 이유는, 한국전쟁이 가져다 준 중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연장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미국과 맞장 떠서 버텼다는 사실은 중국인 입장에선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후의 역사가, “그리하여 이를 발판으로 삼아 중국은…”으로 문장을 잇지 못하고, “하지만 이후 중국은…”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중국의 1960~80년대는 중국인 스스로 평가하기에도 암울한 세월이었다. 중국에서 만났던 초로(初老)의 중국인은, 문화대혁명 시기를 “붉은 머플러를 한 아이가 길가의 누군가를 이유 없이 쏘아 죽이고, 그래도 아무도 덤비지 못했던, 누구든 간에 일가 친척 한 명은 그때 죽었던” 시절로 묘사했었다. 중국의 암울한 세월이 사회주의 본연의 맹점 때문인지, 마오저둥의 과욕 때문인지, 사인방(四人幇)을 위시한 부패 정치인들 때문인지는 여기서 따지지 말자.
어쨌든 양키와 싸우다 죽었으면 모를까, 사상 정화의 깃발 아래 의미 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놓고 자부심을 얘기할 순 없다. 하지만 급속도로 발전된 지금의 중국에서 느끼는 중국인들의 자부심은 또한 대단하다. 그리하여 어색한 연결이 이루어진다. ‘중국인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중간에 간혹 있는 역사적 사실은 예외와 망각으로 제쳐두고, 괜찮은 것들만 연결시켜 근거를 삼게 되는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우리는 승리했다’라는 인식은 곧바로 현재의 발전된 중국과 연결되어 ‘거대한 생산력’ ‘국민경제 회복’ ‘대국으로서의 지위’로 이어진다. 그 사이에 있는 암울함은 고려치 않거나 망각된다. 사실 이는, 이전에 지적했던 ‘중국이 역사적으로 조선반도에 개입한 4번의 사례’에도 해당된다. 여기서 대전제는 ‘중국은 늘 이땅을 도왔으며 운명공동체와 같았다’는 것이며, 여기에 위배되는 역사적 사례(병자호란 같은)는 처음엔 의도적으로 배제되나, 나중에는 정말로 망각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역사 왜곡의 시발점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사실이 아니니 왜곡은 왜곡이겠으나, 그 기초는 암울했던 지난날을 뿌리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지, 남을 업신여기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이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의 경우를 보면 되겠다. 공자, 창힐(처음 한자를 고안했다는 인물)이 동이족이었다거나 백제의 영토가 실은 중국 본토까지 뻗쳐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환단고기를 철석같이 믿는 이들의 주장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개인적으론 믿지 않는다), 이 주장들의 시작이 우리 민족의 힘을 일깨우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을 업신여기고자 하는 마음이 그 출발은 아니다(라고 믿는다). 왜 그런 마음이 생겼는가, 답은 뻔하다. 우리의 지난 날이 암울했기 때문이다.
설령 고구려가 중국 중원까지 쳐들어가 호령했다 한들, 왜국의 문명은 전부 한반도에서 건너갔다 한들 그것들이 현재의 우리를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당신의 조부모가 잘 살았다고 하여 가난한 당신이 곧 부자는 아니듯이. 그러나 그 엄청난 시간의 왜곡을 뚫고 사람들이 민족 자긍심의 횃불에 쉽게 스스로를 불태우게 되는 건, 현재 우리는 어떻게든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위대하다’는 전제를 채택하고 그에 맞추어 역사를 해석해버리기 때문이다.
중국인의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것이 성찰없이 진행될 때다. 자신의 암울한 시절을 뿌리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으니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것이 허위의식임을 지적당한 후에도 뿌리치지 못한다면 필경 자국 위주의 역사왜곡으로 치닫는다.
요약해보자.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했다는 주장이 타당할지라도, 이를 중국인의 자부심으로 연결시키는 과정에서는 ‘왜곡’이 개입하며, 그 왜곡은 우리도 공감할 수 있는 암울한 세월에서 연원한다. 이것을 비판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필자에게 그 ‘비판의 방법’을 묻는다면, 오히려 ‘칭찬’이 가장 좋은 비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역시 개인적인 경험이다. 중국 어느 소도시의 공무원과 단 둘이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그는 약간은 술에 취해서, 중앙정부를 비판하다가 나중엔 티베트 독립을 찬성하더니, 급기야 “이럴 바엔 중국은 분열되는 편이 낫다”는 얘기까지 했다. 중국인 입에선 정말 듣기 힘든 말이다. 그는 정부 관리들이 하나같이 부패해서 저들끼리 해처먹고 있다며 지도층을 맹비판했다. 그땐 필자도 조금 취했는데, 그래서인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중앙이 없었다면 지금 중국은 어떻게 됐겠는가. 공산당에 문제가 있다는 건 맞다. 그렇다고 그때 공산당과 대항한 군벌들이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이었나. 최소한 초기의 마오저둥, 저우언라이에겐 개혁의 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인민의 지지를 얻었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는가.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겠지만 중앙정부가 강한 권력을 잡은 데엔 그만한 역사적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그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아마 우리가 어느 외국인에게, 민주화를 이뤄냈다고는 하지만 현실의 결과물이 개똥 같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는데, 그가 오히려 한국 민주화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해주었을 경우, 당신이 느낄 그것과 비슷한 무언가를 그 중국인도 느꼈을 것이다.
중국인의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건 오히려 쉽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원하는 건 그들과의 다툼이 아니라 교류가 아니었던가. 한중일 국민들은 공통적으로 겸양의 덕을 알고 있다. 내가 ‘우리는 위대하다’라고 외칠 때, 정작 나를 겸연쩍게 만드는 건 그들의 비판이나 비꼼이 아니라, ‘맞어 너희는 위대해’라고 맞장구쳐줄 때다. ‘한국축구는 강하다’고 선언하는 마당에 일본 사람이 ‘맞어 한국은 강해’라고 화답해주면, 일면 뿌듯하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꼭 그렇지는 않은데…’라며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지 않던가.
이제 마무리하자. 중국인의 625에 대한 인식을 고찰해보면 그들의 주장에 나름 일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우리가 가진 인식과 다르다는 점에서 새삼 역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그 사실들을 기초로 하여 재생산된 중국인의 인식에는 지적할만한 문제가 있다. 625가 내전이라는 주장을 기초로 하여 남북한의 지위가 폄하되었다. 중국의 개입이 부득이했다는 주장에선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심리가, 또 중국의 승리를 평가하면서는 중국인의 자부심을 앞세우려는 태도가 있었다.
역사학과 정치외교학의 차원에서는 아마 더욱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될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중국인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앞서 수 차례 강조했듯이, 잘못된 인식이 생겨난 근원을 따져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그 연원에는 누구나 공감할만한 심리가 있다. 그들의 심리를 공감하고 긍정적인 면에 주목해야 우리는 선한 얼굴의 중국인을 만날 수 있다. ‘짱꼴라’와 ‘棒子’의 관념에 갇히게 되면 서로에게 돌아오는 건 악담뿐일 것이다.
거창한 얘기로 끝내니 딴지스럽지가 않은데, 진심이 그러하니 다른 표현이 어렵다. 이해 바란다.
딴지중국통신원 아홉친구
원글주소 http://www.ddanzi.com/news/334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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