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글][역사] 중국인은 625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3, 끝) 중국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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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국인은 625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3, 끝)

2010. 07. 02. 금요일
아홉친구





세 번째로 거론해볼 주장은 중국이 승리를 거뒀다는 이야기다. 지난 번 연재의 댓글에 조선족 분이 이를 ‘축구에서 중국이 브라질과 1:1로 비겨 나름 승리했다고 여기는 것’에 비유하셨는데, 실로 딱 맞는 표현이었다. 우선 콩 교수의 글을 보자.


학생들이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승리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나는 말했다. 무엇이 승리인가? 군사학에서 말하는 전쟁의 승리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전쟁의 목적을 달성했는가, 또 하나는 그 대가가 지나치게 크지 않았는가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목적은 바로 미군이 38선 밑으로 돌아가는 것, 북조선의 독립 회복, 중국의 평화적 건설 유지였다. 이러한 목적은 모두 달성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목적 달성은 절반에 불과했다. 치른 대가를 놓고 보면, 사람, 금전, 물자 어느 방면에서든 상대보다 또 예상보다 적었다. 미군이 전쟁 중 소모한 작전 물자는 7300여만 톤이고, 전비는 830억 달러를 넘었다. 이에 비해 중국과 인민군은 560여만 톤의 물자를 소모했고 전비는 62억5천만 위안이었다. 전국 5억 인구로 따지면 평균 12위안 정도니까, 중국의 경제 건설에는 그다지 영향이 없었다.

또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도 있는데, 그건 중국 인민의 믿음이며, 백년에 걸친 중국의 치욕을 씻어냈다는 데 있다. 고취된 애국심은 거대한 생산력으로 전화되었고, 국민 경제의 회복을 대대적으로 촉진시켰으며, 동북 지역은 국가 건설의 총기지가 되어 중국 공업화의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중국은 대국의 국제적 지위를 회복했고 중국인도 국제 사회에서 어깨를 펼 수가 있었다. 싱가폴의 전 총리 리콴유(李光耀)는 이렇게 회고했다. 한국전쟁 이전에 그가 유럽 여행을 하면 곳곳에서 눈총을 받았는데, 중국이 조선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는 유럽 세관원도 중국인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더란 것이다. 리콴유는 그때부터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니 중국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객관적인 지표상, 한국전쟁에서 전승국은 없다. 하지만 승리를 주장하는 쪽은 북한과 중국이며, 미국은 말이 없다. 미국 역사상,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협상에 응해야 했던 전쟁은 한국전쟁이 처음이었다. 정전협정에 서명한 당사자는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겸 미 육군대장 마크 W. 클라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세 명이다.



설사 중국의 승리 주장이 못마땅하다 한들, ‘한국 승리’는 애당초 성립되지도 않는 환상에 불과하다. 정전협정의 서명국에 한국이 없는 이유는 연합군에 포함됐기 때문이며 협상주체의 실질적인 의미를 따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렇다 해도, 1958년 중국이 북한에서 완전 철수하고 정전협정 행사 권리를 양도한 것에 비하면 초라해질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빌고 빌어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양도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던가(다 아시겠지만, 6월 27일 이명박 대통령은 오바마 미 대통령과 회담을 하여 2012년 4월로 예정된 전시작전권 양도를 2015년 11월로 연기했다).

중국은 한국전쟁의 참전국이자 정전협정 서명국으로서, 최소한 왈가왈부할 자격이 있다. 그리고 미국을 적으로 두어 패하지 않았다고 하면, 1950년대든 지금이든 ‘승리’라고 자찬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세부사항으로 들어가면 콩 교수의 글에도 있듯이, 중국이 미국보다 많은 물자를 소요했을리 만무하다. 그리고 중국의 참전 목적이 ‘미국의 회군’과 ‘북조선의 독립’에 있지 ‘남한 지역의 정복’에 있지 않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

1951년 1월 서울을 재점령한 후, 사령관인 펑더화이와 김일성 사이에 격한 논쟁이 있었다는 야사는 이제 꽤 알려져 있다. 김일성은 기세를 탄 중국이 계속 남진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미군의 예봉을 꺾어 후퇴시키긴 했으나, 진짜 전력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판단했다. 남북한을 둘러싼 어느 정도의 묵계, 즉 38선을 기준으로 한 예전의 대치 상태를 넘어서게 되면, 필경 미군의 전면적인 반격을 자초할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은 그때 이미 원자폭탄의 사용 여부를 검토하고 있었으니, 진군을 멈춘 펑더화이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갈등이 고조됐다. 결국엔 스탈린이 펑더화이의 판단을 지지하면서 김일성도 더 이상 진군을 주장할 수 없었다.

중국이 평화 애호의 차원에서 진군을 멈추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한을 차지하고자 했던 건 김일성이지 중국은 아니다. 남진해봤자 어차피 남 좋은 일 해줄 뿐이며 중국엔 소득이 없다. 이에 비해 초래될 위험성, 미국과의 진짜 전면전은 중국의 국운을 위태롭게 할 수 있었다. 지원군의 참전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면, 진군을 멈춘 것도 중국의 소득과 리스크를 따진 ‘어쩔 수 없었던’ 결정이라고 봐야겠다. 하지만 설명이 다르더라도, 중국의 목적이 남한 정복에 있지 않았다는 말 자체는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열차를 타고 철수하는 중공군들. 조선(북한)인들의 환송을 받고 있다.

사실 이보다 중요하고 뚜렷한 증거는 앞서 말한 1958년 중국 지원군의 북한 철수다. 이로써 중국은 남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으며, 목적이 오직 방어에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떳떳이 펼 수 있게 되었다. 종합해보면 중국이 미국에 맞서 싸워내면서도 지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북조선의 독립 유지’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중국이 전쟁의 목적을 달성했고 이를 토대로 승리를 주장하는 것이 근거 없는 거짓말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 논리는 북한에서도 채택하여 ‘조국해방전쟁의 승리’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경우엔 얘기가 다르다. 중국이야 도와준 입장이니까 그런 얘기도 할 수 있지만, 북한은 그들이 말하는 ‘침략자 미제’가 남한에 개입하도록 전면전을 일으킨 당사자다. 남한에 살고 있는 필자 입장에서 말하자면, 남한이 반세기 넘게 미국의 간섭을 받게 된 원인은 결국 김일성에게 있다. 이승만이 체념하고 바다에 뛰어들었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 게 부자연스러운 행위는 아니었지 않은가.

티격태격하다가 먼저 짱돌을 든 놈이 더 나쁜 거지, 맞고 나서 형 데리고 온 놈이 해괴하다고 할 순 없다. 미국의 간섭이 싫어 ‘반미’를 외치는 게 곧 ‘친북’일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북한이 전쟁 승리를 주장하는 데엔, 정전협정의 서명 당사국이란 명목이 있기 때문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 점에선 우리 스스로가 더 바보짓을 했으니 유구무언이다.

하지만 전쟁의 목적과 소요물자를 근거로 한 ‘승리’ 주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를 소위 ‘환산할 수 없는 가치’까지 몰고 가는 건 오버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판단은 그 당시의 상황에 국한되어야 한다. 당시 이승만은 국민을 속이고 한강다리를 끊는, 무능과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줬다. 그렇지만 전쟁 이후 상황까지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운운하며 따지게 된다면,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미국을 혈맹으로 끌어들인 일이야말로 이승만이 한국에 선사한 최대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아니었다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비록 지정학적 요소가 있었다한들 이 약소한 나라에 그렇게 오랫동안 지원을 해주었을까? 2차대전 이후의 신생독립국(근대적 의미에서) 중에서, 유독 한국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최대의 원인은 미국의 전폭적 지원이었다. 한국전쟁 관련국 중 어느 누가 이보다 더 큰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받았는가.

콩 교수가 말하는 “중국은 대국의 국제적 지위를 회복했고 중국인도 국제 사회에서 어깨를 펼 수가 있었다”는 대목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지원군이 미군에 맞서 용맹함이 대단했다고 하자. 그러나 미국에 결정적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었던 원자폭탄을 끝내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물론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군사적으로 볼 때 미국을 꺾었다고 표현하기엔 낯간지러운 일이다. 더 이상의 의미 부여는 과잉포장이라는 거다. 그리고 소련의 지원 이야기는 몰라서 안 한 것인지, 일부러 뺀 것인지 모르겠다. 가령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미그기와 파일럿 교육을 지원하면서도 일부러 소련 군복을 입히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의 미그기로 인해 북위 39도 창천강 이북이 더 이상 미군의 무스탕에 놀아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황상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중국에서는 마치 조선인민군이 패퇴한 후 순전히 자기 힘으로만 미국과 싸운 듯 이야기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6.25 전쟁에 투입된 미그기

전쟁 이후 중국이 얻은 ‘환산할 수 없는 가치’는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중국은 UN군과 싸운 이유로 외교적으론 꽤 오랫동안 고립을 면치 못했다. 1950년 말부터 시작된 지도층의 분열과 숙청, 이후 이어진 문화대혁명으로 얼마나 세계의 조롱거리가 됐는지는 다들 굳게 입을 다문다. 마오이즘이 한때 서방 지식인 사회에서 유행이었던 적이 있고, 그래서 해외 중국인들도 어깨를 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중국이 쭉 승승장구했다면 얘기가 다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중국은 소위 ‘승리의 수확’을 스스로 말아먹었으며, 거대한 생산력의 전화와 경제 회복, 중국의 공업화는 모두 1990년대 들어서나 시작됐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중국은 내국인용의 ‘인민폐’와 외국인용의 ‘외환권(外匯券)’을 따로 운용하던,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1992년 시안(西安) 중심가에는 16차로의 너른 도로가 닦여져 있었으나, 양편 귀퉁이의 1차로만이 차량용이었고 나머지는 자전거용이었다. 그러한 광경이 중국의 치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든 전쟁의 ‘승리자’라는 중국의 공업화가, 정전협정 서명란에도 끼지 못한 한국보다도 늦었다면, 최소한 그걸 갖고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얻었노라고 떠들기엔 민망한 노릇이다.

이 같은 인식이 있는 이유는, 한국전쟁이 가져다 준 중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연장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미국과 맞장 떠서 버텼다는 사실은 중국인 입장에선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후의 역사가, “그리하여 이를 발판으로 삼아 중국은…”으로 문장을 잇지 못하고, “하지만 이후 중국은…”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중국의 1960~80년대는 중국인 스스로 평가하기에도 암울한 세월이었다. 중국에서 만났던 초로(初老)의 중국인은, 문화대혁명 시기를 “붉은 머플러를 한 아이가 길가의 누군가를 이유 없이 쏘아 죽이고, 그래도 아무도 덤비지 못했던, 누구든 간에 일가 친척 한 명은 그때 죽었던” 시절로 묘사했었다. 중국의 암울한 세월이 사회주의 본연의 맹점 때문인지, 마오저둥의 과욕 때문인지, 사인방(四人幇)을 위시한 부패 정치인들 때문인지는 여기서 따지지 말자.



어쨌든 양키와 싸우다 죽었으면 모를까, 사상 정화의 깃발 아래 의미 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놓고 자부심을 얘기할 순 없다. 하지만 급속도로 발전된 지금의 중국에서 느끼는 중국인들의 자부심은 또한 대단하다. 그리하여 어색한 연결이 이루어진다. ‘중국인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중간에 간혹 있는 역사적 사실은 예외와 망각으로 제쳐두고, 괜찮은 것들만 연결시켜 근거를 삼게 되는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우리는 승리했다’라는 인식은 곧바로 현재의 발전된 중국과 연결되어 ‘거대한 생산력’ ‘국민경제 회복’ ‘대국으로서의 지위’로 이어진다. 그 사이에 있는 암울함은 고려치 않거나 망각된다. 사실 이는, 이전에 지적했던 ‘중국이 역사적으로 조선반도에 개입한 4번의 사례’에도 해당된다. 여기서 대전제는 ‘중국은 늘 이땅을 도왔으며 운명공동체와 같았다’는 것이며, 여기에 위배되는 역사적 사례(병자호란 같은)는 처음엔 의도적으로 배제되나, 나중에는 정말로 망각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역사 왜곡의 시발점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사실이 아니니 왜곡은 왜곡이겠으나, 그 기초는 암울했던 지난날을 뿌리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지, 남을 업신여기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이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의 경우를 보면 되겠다. 공자, 창힐(처음 한자를 고안했다는 인물)이 동이족이었다거나 백제의 영토가 실은 중국 본토까지 뻗쳐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환단고기를 철석같이 믿는 이들의 주장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개인적으론 믿지 않는다), 이 주장들의 시작이 우리 민족의 힘을 일깨우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을 업신여기고자 하는 마음이 그 출발은 아니다(라고 믿는다). 왜 그런 마음이 생겼는가, 답은 뻔하다. 우리의 지난 날이 암울했기 때문이다.

설령 고구려가 중국 중원까지 쳐들어가 호령했다 한들, 왜국의 문명은 전부 한반도에서 건너갔다 한들 그것들이 현재의 우리를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당신의 조부모가 잘 살았다고 하여 가난한 당신이 곧 부자는 아니듯이. 그러나 그 엄청난 시간의 왜곡을 뚫고 사람들이 민족 자긍심의 횃불에 쉽게 스스로를 불태우게 되는 건, 현재 우리는 어떻게든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위대하다’는 전제를 채택하고 그에 맞추어 역사를 해석해버리기 때문이다.

중국인의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것이 성찰없이 진행될 때다. 자신의 암울한 시절을 뿌리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으니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것이 허위의식임을 지적당한 후에도 뿌리치지 못한다면 필경 자국 위주의 역사왜곡으로 치닫는다.

요약해보자.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했다는 주장이 타당할지라도, 이를 중국인의 자부심으로 연결시키는 과정에서는 ‘왜곡’이 개입하며, 그 왜곡은 우리도 공감할 수 있는 암울한 세월에서 연원한다. 이것을 비판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필자에게 그 ‘비판의 방법’을 묻는다면, 오히려 ‘칭찬’이 가장 좋은 비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역시 개인적인 경험이다. 중국 어느 소도시의 공무원과 단 둘이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그는 약간은 술에 취해서, 중앙정부를 비판하다가 나중엔 티베트 독립을 찬성하더니, 급기야 “이럴 바엔 중국은 분열되는 편이 낫다”는 얘기까지 했다. 중국인 입에선 정말 듣기 힘든 말이다. 그는 정부 관리들이 하나같이 부패해서 저들끼리 해처먹고 있다며 지도층을 맹비판했다. 그땐 필자도 조금 취했는데, 그래서인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중앙이 없었다면 지금 중국은 어떻게 됐겠는가. 공산당에 문제가 있다는 건 맞다. 그렇다고 그때 공산당과 대항한 군벌들이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이었나. 최소한 초기의 마오저둥, 저우언라이에겐 개혁의 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인민의 지지를 얻었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는가.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겠지만 중앙정부가 강한 권력을 잡은 데엔 그만한 역사적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그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아마 우리가 어느 외국인에게, 민주화를 이뤄냈다고는 하지만 현실의 결과물이 개똥 같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는데, 그가 오히려 한국 민주화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해주었을 경우, 당신이 느낄 그것과 비슷한 무언가를 그 중국인도 느꼈을 것이다.

중국인의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건 오히려 쉽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원하는 건 그들과의 다툼이 아니라 교류가 아니었던가. 한중일 국민들은 공통적으로 겸양의 덕을 알고 있다. 내가 ‘우리는 위대하다’라고 외칠 때, 정작 나를 겸연쩍게 만드는 건 그들의 비판이나 비꼼이 아니라, ‘맞어 너희는 위대해’라고 맞장구쳐줄 때다. ‘한국축구는 강하다’고 선언하는 마당에 일본 사람이 ‘맞어 한국은 강해’라고 화답해주면, 일면 뿌듯하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꼭 그렇지는 않은데…’라며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지 않던가.

이제 마무리하자. 중국인의 625에 대한 인식을 고찰해보면 그들의 주장에 나름 일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우리가 가진 인식과 다르다는 점에서 새삼 역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그 사실들을 기초로 하여 재생산된 중국인의 인식에는 지적할만한 문제가 있다. 625가 내전이라는 주장을 기초로 하여 남북한의 지위가 폄하되었다. 중국의 개입이 부득이했다는 주장에선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심리가, 또 중국의 승리를 평가하면서는 중국인의 자부심을 앞세우려는 태도가 있었다.

역사학과 정치외교학의 차원에서는 아마 더욱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될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중국인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앞서 수 차례 강조했듯이, 잘못된 인식이 생겨난 근원을 따져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그 연원에는 누구나 공감할만한 심리가 있다. 그들의 심리를 공감하고 긍정적인 면에 주목해야 우리는 선한 얼굴의 중국인을 만날 수 있다. ‘짱꼴라’와 ‘棒子’의 관념에 갇히게 되면 서로에게 돌아오는 건 악담뿐일 것이다.

거창한 얘기로 끝내니 딴지스럽지가 않은데, 진심이 그러하니 다른 표현이 어렵다. 이해 바란다.


딴지중국통신원 아홉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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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패배에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이야기



일본이 졌다.

지루한 120분의 경기를 마치고 승부차기까지 하고 나서야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인터넷 게시판을 보면 대다수의 우리나라 네티즌은 일본의 패배를 바라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언론에서는 라이벌이지만 아시아의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서 일본이 8강에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왜 일본의 8강을 올라가길 기원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듀어든도 비슷한 시각에서 칼럼을 썼다.
http://news.nate.com/view/20100629n17588?mid=c0205


듀어든의 칼럼을 읽고 아시아 지역에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전체주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아의 위상이 우리의 위상이고, 우리의 위상이 아시아의 위상이라는 생각


듀어든은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 글을 썼다.

유럽에서는 라이벌 국가의 성공을 바라는 일이 없으며, 떨어지면 우리가 기뻐하듯이 그들도 기뻐한다는 것이다.

라이벌의 성공을 바라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고 말이다.


듀어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한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한국인의 일본 인식에는 라이벌 의식도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큰 국민감정이라는게 있다.

쓸데없이 분쟁만 조장하고 서로를 불편하게 하는 국민감정이 아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문제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그 해결은 역사문제가 해결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일본은 서구의 제국주의를 그대로 배워 아시아 각국을 침략하고 점령했다.

하지만 제국주의 일본은 패망한 후 사과나 보상을 하지 않았다.

독일이 그들의 잘못을 철저히 사과하고 보상한 것과는 완전 다른 태도이다.

지금의 일본은 제국주의 일본의 행적을 사과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오히려 제국주의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 증거가 바로 욱일승천기이다.

욱일승천기는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여전히 욱일승천기를 애용한다.

이번 월드컵 기간에도 일본을 응원하는 일본인들 중 욱일승천기를 걸어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한일 간의 화합도 좋고 아시아의 화합도 좋다.

서로 협력하고 발전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잊지 말자.

반드시 역사문제가 해결되어야 진짜 화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나서 적는 관련 이야기..


작년 가을, 우리학교에 세계적 석학이라는 기 소르망 교수가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나도 그때 시간을 내어 그자리에 참석했었다.

그 때 기소르망은 동아시아의 협력에 관해 강연했었는데

한일관계가 발전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어느 학생이 질문을 했다.

기소르망은 한일간에 공동으로 교과서를 내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와 라이벌인 독일이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태도,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생각하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같은 아시아인 일본이 아닌 파라과이가 이기길 바랐던 것은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뿐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의 생각일 것이다.

일본이 역사문제에서 사과하지 않는다면, 제국주의를 그리워한다면, 계속해서 욱일승천기를 들고 깝친다면,

일본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날, 일본의 성공을 기뻐해줄 수 있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펌글][역사] 중국인은 625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2) 중국이야기

원글 주소 : http://www.ddanzi.com/news/32342.html


[역사] 중국인은 625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2)

2010. 6. 25. 금요일
아홉친구




1편의 댓글에서 언급했습니다만, 625와 관련된 내용이 한국판인 <한국쾌담>에 실리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 아니며 저의 불찰입니다. 이후의 원문은 개인 블로그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책을 사보셔도 됩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위 내용이 중국 시나닷컴 메인 페이지에 링크돼 있었고, 저는 일단 그 부분을 번역하면서 한국판 책을 주문한 데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확인하는 데 하루의 시차가 생겼습니다. 1편에 올라온 내용은 시나닷컴 북코너에 2편으로 나누어 게재된 내용 중 첫째 페이지를 직접 번역한 것입니다. 이후의 인용 부분도 직접 번역한 내용을 기초로 하여, 한국판 책의 표현과는 조금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원문 사이트 http://book.sina.com.cn/excerpt/sz/rw/2010-01-27/1533265742.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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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중국인의 625에 대한 인식을 새삼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많지 않은 기회였지만, 중국인과 대화를 통해서 그리고 가끔씩 나오는 언급을 통해, 한국사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접근하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먼저 얘기해야 할 점은, 이 글에서 나오는 개개의 사실들은 아마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란 것이다. 우리가 역사적 사실 자체에 굉장히 무지하다는 건 반성해야 한다. 쿵 교수는 한국 학생들이 역사적 지리적 상식이 비교적 부족하다고 꼬집었는데, 그건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이 한국전쟁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본적 인식들 중에서, 우리가 참조해볼만한, 즉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보이면서도 한편 우리나라에선 외면 혹은 부인되는 주장을 먼저 정리해보자면,
첫째 한국전쟁은 내전이며,
둘째 중국의 참전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
셋째 중국군은 연합군에 승리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보실 글은 위의 세 가지 주장이 어떻게 확대재생산되며, 또한 현재의 한국에 적용되는가를 다루고 있다. 쿵 교수의 글은 표본으로써 인용되었을 뿐, 그의 저서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지난 번역분에서 ‘한국전쟁이 내전’이란 주장을 이미 읽으셨을 것이다. 침략이라는 개념으로 한국전쟁을 파악할 수 없다는 주장은 남북이 단일민족의 정체성을 모두 갖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 점만 놓고서는 나도 명확한 반박을 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를 기초로 각론에 들어갈 땐 얘기가 달라질 것 같다.

우선, 당시 상황으로 봐선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는가’를 따지기 어렵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내전의 개념과 연관시켜보면 ‘결국 저희들끼리의 싸움에서 누가 먼저 시작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625의 발발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만한 여지는 제공한다고 쳐도, 그것이 탱크를 앞세워 전면전을 택한 북한을 변명해주진 못한다. 설사 국지전을 남측에서 많이 실행에 옮기고, 당장에 북진통일을 할 엄포를 놓았다고 하더라도, 뺨을 때린 자와 칼로 찌른 자를 동일 죄목으로 엮을 순 없듯이, 전면전을 현실화한 것은 엄연히 북한이다. 민족참상의 죄목은 김일성의 몫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콩 교수는 민족의식과 관련해 이승만과 관련된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있었다.





내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살았던 ‘이화장’을 참관했을 때, 그가 미군 사령관 밴 플리트(1951~1953 재직)에게 보낸 시가 있길래 베껴왔다. “반도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장군이 만리 너머에서 왔다. 세 사단(삼군)의 기세가 대단하니 오랑캐는 스스로 허물어졌다.(半島蒼黃際 將軍萬里來 三師成勢壯 胡虜自崩頹)”

이승만 박사는 젊은 시절 뛰어난 수재로 뽑혀 한시도 잘 썼고 서법도 대단히 아름답다. 그의 이 오언절구는 말의 기운이 힘차고 서법은 단순하면서 숙련되어 있었다. 시 속에서는 미국의 대군이 생사의 위기를 겪던 남측 사람들을 도와준 일을 칭송했다.

그런데 이 시는 개념상으로 조금 문제가 있다. 시에서 쓴 ‘오랑캐(胡虜)’란 말은 누구를 말하는 건가? 악비의 <만강홍(滿江紅)>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당당한 기운이 고프면 오랑캐의 살을 씹고, 화기애애한 대화에 목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리(壯志飢餐胡虜肉 笑談渴飮匈奴血).” 이때의 오랑캐는 이민족의 침략자다.

그리고 미군이 이승만을 도와 싸운 적은 김일성이다. 김일성이 비록 싸워서 ‘허물어졌다’고는 하나, 그가 ‘오랑캐’라고 할 수 있는가? 이승만과 김일성, 남과 북, 모두 같은 말과 같은 민족의식을 지닌 동포 아니었나? 오랑캐란 말을 씀으로써, 이 시는 ‘나와 다른 부류’란 뜻이 포함됨은 물론, 일종의 인종차별적인 뉘앙스도 담고 있다.

사실, 만약 말뜻을 살린다고 하면, 미군이야말로 ‘오랑캐’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구원자를 지나치게 칭송한 나머지 제 민족마저 바꿔버렸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보기엔 남북 통일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인 것 같다.


이승만을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가 인종차별자, 더 정확하게는 백인우월주의자였다고 단언해도 반론하고 싶지 않다. 이승만에 대한 호오를 떠나 그는 그런 환경에 줄곧 있었던 인물이니까 말이다. 또한 위 사실을 기초로 하여 나온 쿵 교수의 결론, 즉 ‘남북 통일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 호도된 민족의식일 수 있다는 얘기는 새겨들을만 하다고 여긴다. 북한과 미국이 축구하면 너는 누구 응원할래, 여기서 갑론을박이 일어나는 게 우리 현실 아니던가.

오늘날 이승만을 조명하는 관점은 아주 극단적이다. 국부(國父)라며 동상을 세워야 한다는 이들이 있지만 반면 한반도 영구분단의 초석을 놓은 원흉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쿵 교수의 관점을 포함한, 중국의 일반적 인식은 명백히 후자일테니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이 북한을 오랑캐로까지 표현하여, 자신의 민족적 입장까지 호도하며 미군의 비위를 맞춘 행위가 단지 그 개인의 일이었을까. 남한 사람들이 그에 동조하고 북한을 제 민족과 다른 무리로 여긴 것이 ‘이승만과 그 일당’의 선전과 세뇌로 인한 것인가. 이것 또한 민중들은 알려주는대로만 알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는 극단적 비하가 아닌가.

바꿔 말하면, 이승만이 어떤 이유로 북한을 오랑캐로 보았든, 그게 남한 땅에서 오랜 시간 효력을 발휘한 데엔 국민들의 동의가 있었다는 거다. 빨갱이는 우리 민족도 아니라는 인식은 지금까지도 생명이 다하지 않았다. 그러한 인식은 당연히 전쟁의 참상에서 연유한다. 전쟁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따지자면 이승만과 미국이 결백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전면전을 시작한 책임만은 김일성이 피해갈 수 없다. 그러니 시에서 보인 이승만의 엉터리 민족의식을 곧바로 민족의식 호도된 현실과 연계시킬 순 없다. 거기엔 국민들의 동조가 있고, 그렇게 만든 김일성의 책임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더 슬프고도 모순된 사실은, 중국인들이 모든 책임을 이승만에게 전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승만이 ‘미제의 얄팍한 앞잡이’였다고 하면 아마 김일성은 ‘무능력한 허풍쟁이’ 정도가 될 거다. 이미 게재됐던 문장을 다시 간추려 인용해보자.


사실 김일성의 인민군 주력부대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대의 3개 ‘조선군 사단’, 즉 중국 강남을 휩쓸었던 린퍄오(林彪)의 부대였다.

베이징대 역사학과 겸직 연구원이며 중국 역사학회 이사인 셴즈화(沈志華)에 따르면, 1945년 이후 중국 동북부의 조선인은 약 120만이었고, 그 중 약 5만 명이 제4야전대에 참가해 있었다. 김일성은 남측 군사도발의 형세가 위급하다고 여기고, 마오저둥(毛澤東)에게 연락해 이들 조선군 사단이 ‘고향을 지키도록 귀국하기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마오는) 린퍄오에게 지시해 이 호랑이처럼 용맹했던 병사들이, 장비까지 챙겨 조선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경험이 풍부한 팔로군과 제4야전대 출신의 인민군은, 이미 사평, 장춘, 금주, 영구를 탈환한 경험이 있었고, 2백만 강남 병사를 잿더미로 만들었던 백전노장들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의 전투가 그들에게 어려울 리 있었겠는가? 김일성은 흥분해서 조국통일대회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략에 귀신 같았던 마오저둥은 이 소식을 듣고 오히려 근심했다. 그는 미국이 반드시 손을 쓸 것을 알고 있었다… 맥아더는 펜타곤의 한결 같은 반대를 무릅쓰고, 5000분의 1의 도박이었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하지만 맥아더의 위계는, 사실 공산당도 이미 알고 있었다. 8월 하순, 해방군 합참 작전실에서는 인천 상륙을 예상했을 뿐만 아니라, 9월 15일 새벽이라는 작전 시간까지 정확하게 계산해냈었다. 마오저둥은 보고를 듣고, 즉각 김일성에게 이를 통지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마오의 경고를 별다른 가치가 없다 여기고 무시했다. 그리고 이를 비밀에 부치도록 명령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한마디로 김일성은, 중국이 밥상 다 차려주었고 거기다 귀띔까지 해주었는데도 이를 무시한 바보 멍청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하자면 마오저둥은 물자 지원과 정보를 아끼지 않았고 상대의 수를 다 꿰뚫은, 전쟁의 천재로 묘사된다. 인천상륙작전을 기획한 맥아더도 그에 버금가는 인물이다.

중국인들의 625 인식에 있어서, 이승만이 미국에 징징거리는 것밖에는 할 줄 모르는 인물로 비쳐지는 건, 뭐 당시로선 적국 수장이었으니 그렇다고 치자. 그렇지만 김일성 역시 무능력하기는 비슷했다는 암시가 위 표현에는 깔려 있다.



실제로 대놓고 김일성을 폄하하는 중국인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김정일은 아니지만. 아마 여기에는 이후의 경제적 낙후 이미지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추측되지만, 물론 증거는 없다. 어쨌든 필자는 제4야전대가 과연 용맹했는지, 그리고 그런 용맹한 부대는 아무데나 갖다 놔도 새 지휘관의 능력과 무관하게 무조건 잘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21세기 현대전에서도 어려운, 적국 기습의 날짜와 시간까지 맞추는 능력은 제갈공명의 비급을 마오저둥이 손에 넣었기 때문인지도 잘 모르겠다. 선생님이 ‘이 문제 시험에 나오니까 주의하라’고 하는데도 동그라미 쳐놓지 않는 학생이 있다면 바보 천치임에 틀림 없다. 현실적으로 마오의 경고는, 시험 범위 내에 풀어봐야 할 문제가 많듯이 수많은 주의사항 중 하나였을테고, 자만했거나 운 없는 김일성이 그걸 경시했다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어딘가 처량한 느낌이다. 이승만과 김일성이 동시에 바보 천치가 돼버리니 마음 속 깊이 잠겨 있던 민족의식이 꿈틀댄다. 하지만 냉정해져야 한다. 필자는 이것이 중국만이 아닌, 강대국이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기본적 인식이며 현재의 남북한 인식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강대국 위주의 인식에 따르면 남북한은 미국과 중국을 등에 업은 꼭두각시들에 불과하다. 과연 세계사에서 한국전쟁을 남북한의 전쟁으로 받아들일까, 아니면 미국과 중국이 맞붙었던 전면전으로 묘사할까. 콩 교수의 글 중에도 ‘약소국은 외교를 할 수 없다’는 말, 그리고 이승만과 김일성은 정치적 노리개에 불과했다는 표현이 있다. 그걸 사실로 받아들여야만, 우리가 ‘자랑스런 한국’을 외칠 때마다 외국인들이 가지는 뜨악한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로선 애초부터 미국과 중국 정도만 알면 됐지, ‘코리아’든 ‘대한민국’이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든 새삼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었을 테니.

이러한 결론을 얻은 후 다시 주제로 돌아와보자. 애당초 한국전쟁은 내전이었다고 하면, 그것을 내전이 아니게 만든 책임, 그리하여 꼭두각시된 처지의 처량한 느낌을 지속시킨 책임은, 당연히 ‘내전에 외국군을 처음 끌어들인’ 측에게 있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중국이 한국을 같잖게 보는 근본적인 이유이며, 지금까지도 그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지난 5월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정부에서는 왜 그 사실을 귀띔해주지 않았느냐고 중국 정부에 항의했다. 현인택 통일부장관은 중국 대사를 불러 발언 수위를 높였는데, 이 때 장신썬 중국 대사는 대놓고 “카메라에 녹음기까지 틀어놓고 뭐하는 짓이냐”며 불쾌해했다. 이는 곧, 넌지시 ‘거 좀 알려주지 그랬느냐’ 정도는 이해하겠으나,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에 그런 훈계를 들을 이유는 없다는 뜻이었다. 이어서 중국 외교부에선 공식 브리핑을 통해 “어떤 국가 지도자의 방문을 수락하는 건 중국 내부문제며 주권 범위에 있는 것”이라며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당연히 이건 중국의 말이 맞고, 한국 정부가 지나치게 오만했던 것이다. 다만 이 이면에, 차라리 미국에 알려주면 알려줬지 한국에 그럴 이유는 없다는 태도도 있다는 건 알아두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뻘실수와 무관하게, 중국 정부는 기본적으로 한국 정부를 그렇게 대해왔다는 거다.

내전에 먼저 외국군을 끌어들인 게 남한이라고 하면, 중국은 왜 나섰는가라는 물음이 이어진다. 여기부터 앞서 정리한 중국인의 인식 두 번째 항목이 출발한다. 중국은 어쩔 수 없이 출전한 것이니 침략이 아니라는 논리.





한 학생이 물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째서 우리를 침략한 것입니까?

내가 말했다. 미국이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와 중국을 향해 칼날을 번뜩이고 있는 상태였다. 비행기가 동북에 폭격을 가하고, 탄저병까지 흘러 들어오고 있는데, 치지 않을 수 있는가? 중국이 뭐하러 그쪽을 치겠나? 중국은 자기 안전을 지켜야 했다. 이제는 공개된, 마오저둥이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보낸 전보에 이렇게 쓰여 있다. “… 우리가 출병하지 않고, 적이 압록강까지 밀고 오면, 국내 및 국제적 반동 기류가 더욱 높아진다. 그러면 여러모로 불리하고, 무엇보다 동북이 불리하다. 동북 전체가 먹혀버릴 수 있고, 만주 남쪽의 전력 공급도 막힐 수 있다.” 현재 중국이 북한에 병사 하나라도 주둔시키고 있는가? 미국의 전쟁역사전문가 존 톨란드는 1989년 5월 5일 이렇게 말했다. “중국의 조선 출병은 국가 이익을 고려한 결과로, 부득이한 일이었다. 만약 소련이 멕시코를 친다면, 미국은 5분 내에 출병을 결정할 것이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는 데엔 나름 일리가 있으며, 당시 중국의 내부 상황이 미국과 전쟁을 할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이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콩 교수는 덧붙이고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한국판에는 이 부분이 빠져있다. 논란을 피하고 싶어서였을까? 왜냐하면 이 대목은 역사적으로 중국이 한반도에 개입한 전쟁들을 거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판 책에는 없는 문장들이니 통째로 소개할 수밖에 없겠다.


그 다음에 나는 학생들과 함께, 중국군이 참여한 네 번의 ‘한국전쟁’에 대해 회고하기 시작했다.

중국군이 대규모로 조선반도에서 작전을 벌인 것은 모두 네 차례다. 첫 번째는 당이 신라통일을 도운 일이다. 당시 조선반도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삼국으로 분열돼 있었고, 왜국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와 고구려는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의 조공길을 막았다. 신라는 당의 천자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당 고종은 설인귀, 소정방 등의 장수를 연이어 출정시켰다. 이 일은 중국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설인귀정동(薛仁貴征東)’으로 유명하다. 나당 연합군은 왜구를 대패시키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여 조선반도의 통일을 이뤄냈다. 신라 문화는 찬란하게 꽃피어 최치원과 같은 걸출한 문호를 낳았다.

두 번째는 조선 중기, 일본의 간파쿠(關白)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명국을 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멀리 천축까지 치겠다”는 망상을 실현에 옮겨 먼저 조선을 삼켰던, 역사에 임진왜란으로 기록된 전쟁이다. 200년 동안 전란이 없었던 조선은 ‘소중화’라 스스로를 칭하며, 태평성대에 문무 관리들은 안일하고 향락에 젖어 있었던 터라, 두 달만에 삼경(三京, 개성, 평양, 한양)이 함락되었다. 조선 국왕은 중국 국경까지 도망가 ‘죽어도 천자의 나라에서 죽겠다(死於天子之國)’고 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명나라 조정은 조선의 구원 소식을 듣고 바로 알아차렸다. “간파쿠가 조선을 도모하였으나 속셈은 중국에 있도다.” “우리 병사로 조선을 구함은 사실 곧 중국을 지키는 일이다.” 이 말은 바로 “왜에 항거해 조선을 도와, 고향과 나라를 지킨다”는 뜻이다. (주 : 원문은 抗倭援朝, 保家衛國. 여기서 ‘倭’ 한 글자만 ‘美’로 고치면 625때의 표어와 같음. 임진왜란 때와 625때의 중국 입장이 같음을 암시하고 있음.)

명나라 만력황제는 뱃길과 육로로 대군을 보내 왜군을 처단했고, 조선 각지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저항하여, 7년간 전쟁이 계속되었다. 조선 노장 이순신과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이 격전 중에 순국했다. 결국 왜구들은 대패해 도망갔고, 히데요시도 병으로 죽었다. 조선은 강산을 되찾으면서, 대명(大明)을 부모처럼 여겼다. 유교 문화는 이 때부터 조선반도에서 비할 수 없이 존귀한 위치로 격상되었다. 조선 선조는 말했다. “중국은 부모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같은 외국이니 아들과 같다. 그 부모와 아이의 관계를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효자요 일본은 망나니다.(中國父母也 我國如日本同是外國也 如子也 以言其父母之於子 ?我國孝子也 日本賊子也)”(선조실록 卷37) 중국군의 승리는 다시 한번 조선반도 인민의 평화를 가져왔고, 조선반도 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세 번째는 청나라 말엽의 갑오전쟁(청일전쟁)이니 다들 알 것이다. 부패한 청나라 군사들이 아산에서, 한양에서, 평양에서 연거푸 지고 나중엔 수군마저 몰살당했다. 조선을 지키기는커녕 중국 자신도 지키지 못해, 배상금을 지불하고 땅을 할양하는 치욕을 당했다. 조선과 대만을 함께 일본에 양도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실패는, 조선 인민을 50년의 망국 노예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은 정치상으로 볼 때 예부터 독립국이었지만, 민족적 운명에 있어서는 중국과 흥망성쇠를 줄곧 함께 했다. 2차대전 말기 서양 열강이 한국의 독립을 가로막고, 연합국이 위탁 관리하겠다고 했을 때, 장졔스와 마오저둥은 마치 합의라도 한 것처럼 한국의 독립 및 인민에게 자유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반도의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역사가 종지부를 찍었다.

네 번째가 바로 ‘항미원조’, 한국전쟁이다. 김일성이 38선을 넘었을 때 미국은 협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맥아더가 38선을 넘고 압록강까지 치고 왔을 때, 동북은 중국 전체의 공업기지였으니, 중국은 나중에 뭐에 기대어 나라를 꾸리겠는가? 중국 입장에서 협상이 가능하겠는가?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대외교(Diplomacy)>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마오저둥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만약 그가 그 선에서 미국을 막지 않는다면, 나중엔 중국 영토에서 미국과 교전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최소한, 그가 그 반대의 결론을 내릴 이유는 없었다.” 실력으로 볼 때, 중국은 근본적으로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나라는 상처투성이였고 이제 막 뭔가 시작하려는 때였다. 1950년 6월 30일, 미국이 한국전쟁에 전면 개입하기로 결정한 그날 중국은 ‘토지개혁법’을 공포했고, 같은 날 중앙정부에선 마오저둥과 저우언라이가 공동 서명한 ‘1950년 복원공작에 관한 군 위원회와 정무원의 결정’을 하달했다. 토지개혁, 노동력 공급(복원), 비적떼 소탕, 물가안정, 생산력 회복, 대만 수복 등등 어느 하나 중국이 미국과 전쟁을 벌이기엔 무리인 상황이었다. 중국이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도록 만든 건 바로 미국이었다. 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悔)는 출정을 앞두고 장교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지원군이라고 하는데, 사실 나도 지원한 건 아니다. 미군이 압록강까지 밀고 오지 않았더라면 나도 지원하지 않았을 거다. 이제 그들이 우리 집 문 앞까지 치고 왔으니, 내가 먼저 깃발 들고 나가겠다. 너희들은 어찌할테냐?” 중국 장교들이 소리쳤다. “지원합니다!” 원하지 않아도 사실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말씀드린다. 필자는 콩 교수에게 어떤 반감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굉장히 용감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얘기를 중국 지식인들은 함부로 꺼내지 않는다.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으면서도 말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이 내용이 출판되면 비난을 받을까봐 근심했기 때문에 삭제됐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판 책의 다른 내용을 읽어봐도, 콩 교수는 기본적으로 ‘용감하게 까발리는’ 태도를 취한다. 한국을 얕잡아봐서가 아니라, 솔직함이야말로 한국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비판을 드러내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서다. 덕분에 필자는 중국인들과의 경험들을 다시금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 인정할 건 인정하고, 맞대응할 건 하면 된다. 앞에서는 찬미하다가 뒤에서 호박씨 까는 외국인들보다야 백번 천번 낫다. 불필요한 감정적 댓글은 없기를 바란다.)

콩 교수가 언급한 ‘조선 땅에서의 4번의 작전개입’은 지금껏 여러 차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중국 학계에서의 학설과 별도로, 보통 중국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조선반도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중국이 도움을 주었고, 약탈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중국에 힘이 없었기 때문이니,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라고 또한 생각한다.

이 관점이 무조건 허황됐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중국의 다른 어떤 주변국과 비교해도, 확실히 이 땅의 정권들은 중국과 사이가 좋았고, 반목의 시기보다 추종의 세월이 훨씬 길었다. 중국의 위정자들은 자신을 받들어주는 나라들에 그리 야박하진 않았다. ‘조공무역’이란 말이 있듯이, 이웃나라가 조공을 보내오면 중국 특유의 체면치레상 더 많은 선물을 안겨주기도 일쑤였다. 자존심 조금만 참으면 실속 챙기기 좋은 게 조공무역이었다. 그런 사실들을 제외하고라도, 반목의 상황에서도 저희의 사상과 제도를 충실히 배우고 또 실현했던 이곳을 중국이 나쁘게 볼 이유는 없었을 것이며, 스스로 뿌듯해하며 자기만족을 표현한 기록도 많다(개인적으로는, ‘동방예의지국’이란 표현이야말로 중국인의 뿌듯함을 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역사가 2천 년은 이어졌으니, 어려울 때면 돕고자 하는 의리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자기만족과 의리 명분을 중시하는 정서는 없어지지 않았다. 중국이 북한을 꾸준히 원조해 온 이유에는, 나름의 실리를 고려했겠으나 국민 정서상의 요소도 없지 않다. 중국 내부에서 북한 원조를 중지하자는 목소리가 이제는 점점 거세지는 추세지만, 그 반대의 여론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놓고서 역사적으로 중국과 한국(조선)이 민족 공동운명체라고 하는 건 전제가 잘못되었다. 이땅의 사람들이야 한 민족이라고 하지만, 중국은 대체 어떤 민족이라는 말인가. 만약 그게 한족이라고 한다면 한족이 세운 조정만이 중국에 해당할 테니, 원나라와 청나라는 나라를 뺏긴 식민지 시절이라고 규정해야 마땅하다. 즉 중국이란 아이덴티티의 부재 상황이 원과 청을 합쳐 400 년은 된다는 얘기다. 아마 이 말에 동의할 중국 학자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만약 원나라와 청나라도 중국에 포함된다면, 중국이 한반도에 참전한 횟수가 4회에 그칠 리 없다. 고려 때 원나라의 침공은, 그리고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은 왜 포함되지 않는가. 소위 ‘중원’을 차지하지 않은 상태에선 여진족과 몽고족의 정권은 ‘중국’이 아니란 말인가. 그럼 조조의 위(魏)와 유비의 촉(蜀)은 외국인가. 이를 모를 리도 없건만, 중국 학자들은 교묘하게 이를 피해간다. 중국의 아이덴티티를 어디에서 찾느냐는 문제는 재미있는 화두지만, 일단 여기서는 줄이도록 하자.

그러니까 중국에서 북한을 도와 참전한 것을 마치 역사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듯 말하는 데엔, 또다른 정서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한다. 앞서 중국이 나름의 의리도 있었겠다고 말했지만, 그 이면에는 ‘자기만족’도 있다고 지적했다. 의리 명분과 자기만족의 양면성은 우리가 중국인의 인식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중국이 이 땅에 군사적으로 개입한 역사를 ‘의리 명분’의 차원에서 이해하면서 선린 관계를 강조하는 건 좋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자기만족’의 재생산을 읽는 건 우리의 몫이다. 이 부분을 유념해보면, 우리 옛 조상들이 때때로 도움을 받아 중국에 머리를 조아렸던 역사는 지금까지도 유효하고, 그러니 북한은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는, 그래야 중국인의 자기만족을 채울 수 있다는 함의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인식은 비단 북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족의 함의에 극단적으로 치우친 중국인의 눈에는 아마, 한국 사람들은 저희를 배신하고 미국에 머리를 조아리는 듯 보일 것이다. “저들은 역사 이래로 우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부모 내지는 형님으로 받들었으면서, 이제는 양놈들의 비위를 맞추는가? 우리가 좋게 봐주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멸망했을 속국 녀석들이?” 일부 중국인들이 우리를 비하하며 ‘속국’과 같은 표현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을 끌어들인 당사자인 이승만을 중국이 결코 좋게 평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 과연 세계 열강의 개입을 떨치고 자주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는지는 골칫거리다. 몇천 년 동안 중국이 우리에 개입했고, 또 일본이, 지금은 미국이 한반도의 남쪽에 간섭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열강들의 틈에서 우리의 살길을 모색하는 것과, 무조건 중국을 형님으로 받드는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전자에는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 선언 내지는 변화무쌍한 외교적 수완을 무기로 삼을 여지가 있지만, 후자는 예속국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에는 어쩔 수 없는 요인이 있었겠지만, 그것을 역사와 결부시키는 행위는 ‘어쩔 수 없이’ 당연한 귀결이 아니다. 중국인들은 이 땅의 사람들이 예전처럼 자신들을 따름으로써 얻었던 자기만족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한다. 그 선상에서 ‘장졔스와 마오저둥은 마치 합의라도 한 것처럼 한국의 독립 및 인민에게 자유를 돌려줄 것을 요구’한 이유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 땅이 여전히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고 믿었다.

이 문제에 대해 마지막으로 첨언해야만 할 것이 있다. 필자가 가장 말하고 싶었던 대목이 여기다.

의리 명분과 자기만족은 동전의 양면이다. 무슨 얘기냐면, 중국인의 인식을 한 쪽에만 근거해서 파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게 원래가 복잡미묘하지 않던가. 만약 당신이 어느 중국인에게, 너희는 근대사의 오점으로 자국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을 잃어버린 탓에, 한국의 발전을 보며 자기만족은커녕 질시와 증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면, 그는 엄청나게 화를 내며 속국 운운의 욕설을 퍼부을 것이다. 그런 면이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으니까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너희는 비록 서양식 근대의 관점에서는 우울한 시기를 보냈으나 오랜 전통의 힘이 머잖아 발현될 것이며, 우리가 바로 그 중화 문명을 배웠고 또 서양을 배워 지금에 이르렀으니 옛날 ‘형님’ 국가도 곧 위세를 회복할 것이라 덕담을 해준다면, 당신은 그에게서 진짜 중국 ‘펑여우(친구)’의 정이 무언지를 물심양면으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시 사실이기 때문에 기쁜 것이다.

중국인의 인식을 수긍하고 참고해야 할 지점, 그리고 비판해야 할 지점은 다르지 않다. 연원은 같다. 같은 사람에게서 협소함과 호방함을 다 볼 수 있는 법이다. 중국인이 한국, 북한에 대해 느끼는 질시와 동정의 동전을 뒤집으면 부러움과 떨떠름함을 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의견이 앞선다면, 일전에 ‘분식집에서의 단상’이란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당신은 당신의 의견과 일치하는 한쪽 면밖에 보지 못한다. 그래서 중국인이 한국/북한을 자기 영향력 안에서 인식하고자 하는 경향을 통해, 누군가는 널리고 널린 중국과 한국의 공통점을 통해 어떤 외국보다도 친밀한 정을 금방 쌓을 수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짱꼴라들의 지긋지긋한 허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장졔스와 마오저둥이 조선 독립을 지지한 내면에는 ‘그들은 원래 우리 형제’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본다. 여기서의 ‘형제’엔 권력관계와 우애의 관계가 다 포함돼 있다. 불가분이다. 어쩌면 중국의 학문과 제도를 배우고 현실에 옮겨야 했던 우리 조상들은 내내 이 문제를 근심하지 않았을까.

(다음에 계속)
딴지중국통신원 아홉친구

원글 주소 : http://www.ddanzi.com/news/32342.html

[펌글][역사] 중국인은 625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1) 중국이야기

딴지에 중국의 6.25인식에 관한 글이 올라와서 퍼왔다.
꼴에 중국학 전공한다는 내가 관심을 아니 가질 수 없는 글이다.
교수님들로부터도 들은 것 이상의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이야기이다.
한국전쟁 관련 기사라 시사 카테고리에 넣어도 되겠지만
기사의 요는 중국인의 한국전쟁 인식과 중국측의 입장이므로 중국이야기에 넣는다.

원글 주소 : http://www.ddanzi.com/news/32084.html


[역사] 중국인은 625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1)

2010.06.24.목요일
아홉친구





한국전쟁, 중국 표현으로는 ‘抗美援朝’ 전쟁 또는 조선전쟁이라 부르는 그 전쟁이 발발한 날이다. 중국 관련 기획 기사를 쓰고 싶어서 이것저것 뒤지던 중 글을 하나 발견했다. 사실 중국에는 625와 관련된 책과 논문이 아주 많다. 중국이 한국전쟁을 기념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과 맞붙어 ‘승리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왜 승리라고 생각하는지는 이 연재를 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당시 중국 지도부는 아직 부패하기 이전의 ‘열혈’ 엘리트들이었다. 이때의 기록을 찾아보면, 실로 삼국지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생생한 전쟁의 내막이 득실댄다.

아래 글은 중국 교수 콩칭둥(孔慶東)의 이야기로, 중국에 출판된 <匹馬西風>이란 책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한국쾌담>이란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하지만 아래에 번역한 내용은, 곧 배달될 책을 뒤져보면 좀더 명확해지겠지만, 한국판에서는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625를 중국측 시각에서 해설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인식과는 사뭇 다른, 오히려 정반대의 결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반이 콩칭둥(孔慶東)


625에 대한 다른 시각의 접근이 처음은 아니다. 아마 서점에서 조금만 ‘사상이 빨간’ 책을 찾다보면 쉬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 내용을 번역한 건 625의 재조명을 의도해서는 아니다. 우리의 공식적 입장이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처럼, 중국의 시각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중국 측의 자료가 또다른 생각거리를 만들어줄 수는 있겠으나, 그 자체가 옳은 결론일리는 만무하다. 어느 나라가 자국에 불리한 논점을, 하물며 국가 대 국가의 전쟁 상황과 관련된 비판적 논점을 택하겠는가. 엄연히 공산당 정부 치하의 중국이 그럴리는 더욱 없다.

번역의 취지는 새로운 논점을 전달하는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중국인들이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625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내가 계획하고 있는 기획의 취지도, 중국인이 한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걸 기초로 자료를 수집하다가 마침 번역을 하게 되었다. 취지를 감안해서 보시기 바란다. 사실, 읽다 보면 대단히 재미있다.





압록강을 건너는 중국 인민해방군

한국에서 두어 해 살면서, 일상적인 대화, 수업, 강연 및 인터뷰에서 나는 수십 차례 ‘한국전쟁’을 언급했고, 또한 대학원에서도 몇 번인가 강의한 적이 있다. 내 생각에, 이 문제에 관한 한 한국과 중국 국민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존재한다. 민족적인 입장 차이를 제외하자면, 중국 인민이 얻는 정보들은 소스가 다양하여, 중국인은 객관적으로 중국, 미국, 영국, 일본, 러시아 및 한국의 책에 접근할 수가 있으므로 ‘병행분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은 민주국가라곤 하지만, 국민들이 얻는 정보는 주로 미국에서 오고, 심지어는 미국의 입맛에 따라 선택된 것들도 많다. 또한 한국 학생들의 보편적인 역사적, 지리적 상식이 비교적 낮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처음 이들과 교류를 시작할 적에는 아주 힘들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한국전쟁’과 관련해 가지고 있는 기본지식은 이렇다. 야만스럽고 낙후된 공산주의가 우리 번영하고 부강한 자유세계를 침략했고, 용감한 미국 국민들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전세계 사람들에게 우리를 도울 것을 호소했으며, 결국엔 하늘의 도움으로 우리는 금수만도 못한 적을 무찔러, 민주주의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나는 매번 강의 전에 학생들에게 수업 내용을 준비하도록 하였고, 한국 정부의 견해를 요약하도록 했다. 그 정부 자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중국 해방군 90여 만이 한국에서 죽었다고 말이다. 그때 나는 혀를 내둘렀다. 중국군이 가장 많이 동원됐을 때 100만이 좀 넘었는데, 90여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면 38선은 장강(長江)에 그어져야 했을 것이다.

수업이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서, 나는 되도록 미국, 영국, 일본 쪽의 자료를 활용해야 했고, 그래야 학생들이 수긍할 수 있었다. 누가 누구를 ‘침략’했는가란 문제를 나는 우선 지적했다. 남북 쌍방은 원래 한 나라였는데, 만약 외국의 침입이 없었다고 한다면, 남이 북을 치든 북이 남을 치든 모두 내전으로 봐야 하며, ‘침략’이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미국의 남북전쟁을 침략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중국의 국공내전을 놓고 누가 누굴 침략했다고 할 수 있는가? ‘침략’이라는 말을 쓰려면 남북이 서로 다른 국가라는 전제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면 남북통일이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가? 북에서 ‘침략’이란 말을 쓸 때엔 줄곧 미국의 침략을 지적하는 것이며, 남측이 북을 침략했다고는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한국 정부에선 ‘한국전쟁’을 ‘625’전쟁이라고 부른다. 이는 1950년 6월 25일 이날 조선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진한 데서 유래한다. 한국은 일부러 ‘625’라고 이 전쟁을 지칭함으로써, 전쟁의 성격을 ‘침략’으로 규정지을 수 있었다. 지적해보자면, ‘625’이전에, 남북간의 군사적 충돌은 이미 무수히 많았다. 북이 남을 몇백 번이나, 그리고 남도 북을 천 번은 넘게 넘나들었다.

한성대 사회학과 김귀옥 교수는 최근 출판한 책에서 이렇게 밝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9년 6월 29일, 한국군에 속한 호림대대의 유격대 대원 252명이 38선을 넘어 설악산과 금강산에 있는 북한 부락을 습격했다. 일부 대원들은 심지어 북위 39도의 원산시 부근 안변 지구까지 침투했다. 그들은 북에서 2주일 동안 활동했으며, 대부분 죽었고 단지 50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한국 연합통신사에서는 어느 육군 장교의 말을 통해 김귀옥 교수의 이 주장을 실증한 바 있다. 이 장교는 호림대대가 1948년 창건됐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는가를 따지고 들려면, 어느 쪽이 위기 상황이었고 그럴만한 동기가 있었는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당시 북측의 김일성은 ‘평화통일’, ‘전국민선거’를 주장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항일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으므로, 민주적 방식으로 인심을 크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김일성은 국민의 판결에 맡기자는 주장을 계속했지만, 미국과 남측에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김일성과는 상반되게, 남측의 이승만은 ‘무력북진’ ‘군사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조국이 어려움을 겪던 시절, 오랜 기간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2차대전 중에는 조선을 열강에 위탁관리시키자는 주장을 하여 민심의 분노가 컸다. 미국은 이승만보다 더 유능한 대리인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그 때문에 이승만이 남쪽 통치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측의 정치인 무리 중에서, 가장 신망을 받았던 사람은 중국 국민당 정부를 따라 각지를 떠돌며 조국 광복에 힘썼던 김구 선생이었다. 나는 이화여대 도서관에서 김구 선생이 몇 차례 장졔스(蔣介石)에게 보냈던, 진지하고 성심이 담긴 편지를 찾아보았고, 이를 보여주자 학생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이승만은 김구의 신망을 질투하고 또한 두려워했기 때문에, 특무를 보내 그를 암살했던 것이다.

장졔스는 김구를 위한 추도사에서 이렇게 썼다. “나라를 위해 독립을 구하고, 민족을 위해 자유를 쟁취하니, 위대하도다! 이 사람은 흥멸을 거듭하며 의를 취해 인을 이루었다. 고단함에서 절개가 보이며 역사 속에서 바른 기운이 빛난다”. 이는 매우 대단한 평가였다. (爲國家求獨立爲民族爭自由偉哉斯人興滅繼絶取義成仁見大節于顚沛昭正氣于千秋)

미국은 이승만의 행패가 몹시 불만스러웠으나, 일본인이 남긴 폐해를 수습할 만한 마땅한 인물이 없었고, 또한 반공의식이 결연했기 때문에 마지못해 경이원지(敬而遠之)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조선과 대만을 모두 방어선 밖으로 구획지음으로써, 공산당이 대만을 차지하도록 방임하는 한편, 38선의 현상 유지 정도만 바라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은 전쟁을 벌여야만 자신의 정치 생애를 위해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가 있었다. 또한 1945년 광복 직후의 군사력에서 남측은 명확하게 북측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군사력이 비교적 약한 북측이 어떻게 파죽지세로 이승만을 부산까지 내몰 수 있었을까? 나는 한국 친구들에게 국제학계에선 이미 알려진, 그러나 한국 학자들은 대부분 모르는 내막을 말해주었다. 사실 김일성의 인민군 주력부대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3개 ‘조선군 사단’, 즉 중국 강남을 휩쓸었던 린퍄오(林彪)의 부대였다.

베이징대 역사학과 겸직 연구원이며 중국 역사학회 이사인 셴즈화(沈志華)에 따르면, 1945년 이후 중국 동북부의 조선인은 약 120만이었고, 그 중 약 5만 명이 제4야전군에 참가해 있었다. 김일성은 남측 군사도발의 형세가 위급하다고 여기고, 마오저둥(毛澤東)에게 연락해 이들 조선군 사단이 ‘고향을 지키도록 귀국하기를’ 요청했다. 마오는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국제주의자였다. 또 중국에서의 혁명이 막 승리를 거두려는 시점이었고, 대만을 해방시키는 데엔 그렇게 많은 병력이 필요하지 않으며, 병사는 금방 다시 채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린퍄오에게 지시해 이 호랑이처럼 용맹했던 병사들이, 장비까지 챙겨 조선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1950년 4월 18일 마지막 조선군 사단이 원산에 돌아왔을 때, 이승만은 이를 모르고 여전히 북측 침범을 계속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신속하게 이 3개 사단을 주축으로 하여 15만 정예 대군을 갖추었다. 6월 25일, 스탈린의 묵인 하에, 또 마오저둥을 속인 북측은 일거에 38선을 넘어 서울, 수원, 인천, 대전까지 함락시키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남측의 90% 이상을 점령했고, 남은 한미 연합군은 낙동강 이남의 협소한 구역에 몰리고 말았다. 경험이 풍부한 팔로군과 제4야전군 출신의 인민군은, 이미 사평, 장춘, 금주, 영구를 탈환한 경험이 있었고, 2백만 강남 병사를 잿더미로 만들었던 백전노장들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의 전투가 그들에게 어려울 리 있었겠는가? 김일성은 흥분해서 미리 조국통일대회까지 준비했다.

하지만 전략에 귀신 같았던 마오저둥은 이 소식을 듣고 오히려 근심했다. 그는 미국이 반드시 손을 쓸 것을 알고 있었다. 38선은 반도 남북의 경계가 아니라, 동방과 서방의 경계였다. 미국이 수수방관할 리 없었다. 역시나2차대전의 명장 맥아더는 비분강개한 연설을 통해 미 국회를 감동시켰다. 칠순이 넘은 맥아더는 다시 전쟁의 포화 속으로 들어와, 연합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대한민국을 ‘공산당의 마수에서 구해’내고자 했다.



이승만과 맥아더


맥아더는 펜타곤의 한결 같은 반대를 무릅쓰고, 5000분의 1의 도박이었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군사적으로 볼 때 인천 상륙의 성공률은 500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인천 앞 조수간만의 차이는 최고 11.2미터에 이르렀는데, 이는 세계 최고의 고저차였다. 썰물이 되면 몇백 년 묵은 뻘밭이 4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진다. 그래서 상륙은 오직 밀물 때에만 가능했지만, 인천의 밀물 최고조는 아침 6시 59분과 오후 7시 19분에 한번씩 일어나며, 2시간도 채 지속되지 않는다.

만약 2시간 내에 연안을 돌파하지 못하면, 뻘에 틀어박히게 될 함대는 모두 대포의 밥이 될 것이었다. 그 두 시간 내에, 항구 전체를 통제하는 요지였던 월미도를 점령하고, 또 해류의 속도가 시간당 11킬로미터에 달하며 기뢰가 득실대는 비어도 해협을 돌파해야만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결연하게 말했다. 불가능할수록 기습은 성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자신은 11차례 상륙작전을 지휘했고, 모든 전문가들이 안된다고 했지만, 그 11번을 모두 성공시켰다고. 관건은 거기에 있다. 여기 전문가들이 모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그 우매한 공산당 놈들은 더더욱 생각지 못할 것이라고. 앉아서 지켜보라, 이 노병이 해내고 마는 것을!

하지만 맥아더의 위계는, 사실 공산당도 이미 알고 있었다. 8월 하순, 해방군 합참 작전실에서는 인천 상륙을 예상했을 뿐만 아니라, 9월 15일 새벽이라는 작전 시간까지 정확하게 계산해냈었다. 마오저둥은 보고를 듣고, 즉각 김일성에게 이를 통지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마오의 경고를 별다른 가치가 없다 여기고 무시했다. 그리고 이를 비밀에 부치도록 명령했다.” (陳兼, <중국이 한국전쟁에서 걸어온 길 : 중미 충돌의 형성>에서)

9월 15일 새벽, 1만 명에 이르는 미국 해군 육전대가 몇백 척의 함선과 비행기의 호위 하에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준비가 부족했던 인민군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아무도 투항하지 않은 채 몰살됐다. 맥아더는 한 칼에 반도의 허리를 끊어 형세를 역전시켰고, 인민군 주력 부대는 포위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김일성이 죽음을 무릅쓰고 중국 국경에 다다랐을 때, 그의 수중엔 3개 사단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맥아더는 그에게 ‘최후통첩’을 날리며 ‘무조건 항복’하라고 명령했다. 스탈린은 이때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중국 정부에 통지를 했다. “김일성 동지는 중국 동북부에서 망명정부를 세우도록 하라.”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약소국은 외교를 하지 못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38선이란 사실 미국의 어느 참모가 별다른 생각 없이 지도에 그렸던 것이다. 김일성과 이승만은 서로 싸우면서 자신이 민족통일대업을 이룬다고 했지만, 사실 둘다 대국의 정치 노리개였을 뿐이다. 당시의 중국 역시, 소련의 눈에는 그저 조금 더 큰 노리개에 불과했다. 하물며 미국이 중국을 그만큼으로도 봐줬을 리가 없다. 마오저둥이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중국인이 허리를 굽히면 다리를 만들어주는 줄 안다. 미국인은 그걸 밟고 소련에, 소련인은 그걸 밟고 미국에 가려 한다.” 이 씁쓸함은 중국이든 한국이든 모두 아주 충분히 맛보았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이 책의 한국판이 입수되면 수정이 가해질 수 있습니다.)


딴지중국통신원 아홉친구

원글주소 http://www.ddanzi.com/news/32084.html

월드컵 16강 ≠ 병역특혜 뉴스와 시사


탄식과 환호가 오갔다.
실수한 선수를 향한 비판과 위로, 잘한 선수를 향한 칭찬.
이것들과 함께 살떨리던 새벽이 지났다.
우리 대표팀이 아슬아슬한 경기를 펼친 이유도 있고, 실제로 단동의 새벽은 아직도 제법 쌀쌀하기도 했다.
그렇게 16강행이 결정되었다.

아침에 출근해 자리에 앉아서 일을 좀 하다가 인터넷 뉴스를 보았다.
조중연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한국축구대표팀의 병역 면제를 추진해보겠다고 이야기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덧글로 많은 사람들이 찬성과 반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인터넷 게시판마다 관련 의견을 묻는 글이 많았다.
찬성 쪽의 의견은 크게 두가지였다.
1. 세계에 한국을 알리고 국민들을 기분 좋게 했으니 병역특혜를...
2. 축구선수 개인의 발전과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병역특혜를...

그리고 반대 쪽의 의견은 대체로 야구 대표팀은 wbc 준우승하고도 특혜 없었다. 형평성에 어긋나므로 안된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축구 대표팀의 병역특혜를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한다.

1. 이미 국군체육부대로 그들을 배려하고 있다.
이점은 축구 뿐 아니라 군대에서 운영하는 체육부대가 있는 스포츠는 모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스타 크래프트 팀을 운용하는 공군도 물론 포함된다.
똑같이 월급받고 같은 기간동안 군생활하는데 국군체육부대가 무슨 배려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국군체육부대는 정말 큰 배려라고 생각한다.
군대는 당장 전쟁이 나면 나가 싸울 군인을 양성하는 곳이면서
전쟁이 나기 전에는 전투태세를 갖춰 놓음으로써 적의 무력 도발을 억제하는 곳이다.
군대의 하는 일 중 두번 째가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군대에 체육부대가 있어야하는 이유를 좀 나에게 이야기해 줘 봐라.
군대의 존재 의미와 체육부대가 무슨 상관인가.
아, 오해는 하지 말자.
군대 내의 체육부대나 연예 사병, 군악단 등을 없애자고 주장하고자 함은 아니다.

또 병역을 필한 남자분들 중에 현역이든 공익근무든 자기 전공 살려서, 자기의 특기 살려서, 자기 희망직업에 맞춰서 생활하신 분 있으면 손 한번 들어보시라.
학업 혹은 직업과 군대 사이의 연속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얼마나 되겠는가.
대학 다니다가 군대 갔다온 후 복학해서 후배들과 공부하느라 고생하지 않은 사람 어디 있나?
나도 3년 만에 학교에 돌아가보니 1학년 때 배운 기초는 다 잊은지 오래였다.
그래서 이해도 못한 채 무식하게 수백 번 쓰면서 외웠다.
그래도 좋은 성적 받기 힘들더라.
국군체육부대에 소속된다면 재능있는 선수들이 해외 유수 클럽에 진출하지 못하거나 고액 연봉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지 않은 채 군생활을 할 수 있다.
심지어는 자신이 잘 하면 군 생활하면서 국가대표로 선발이 가능하다.
국군체육부대는 모든 스포츠 종목을 운용하지 못하고 일부 종목에 한해서 운용한다.
이 말은 아무리 잘해도 선수생활 도중 현역 군생활을 해야하는 다른 종목 선수들도 있다는 것이며,
보통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병역로 인해 학업이나 자기 계발 등 많은 부분을 희생하고 복학 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과 사뭇 다르다.



2. 형평성의 문제

상대적 박탈감은 생각보다 무서운 것이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직후보다 훨씬 부자나라가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죽겠다고 한다.
이건 왜 그런가.
그것은 빈부 격차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이들 중 어느 한 아이에게 조금 더 관심을 쏟는다면 그것은 관심을 '조금' 덜 받는 다른아이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야기한다.
한국 스포츠 선수들에게는 이미 병역에 관한 배려가 규정으로 존재한다.
귀찮아서 제대로 찾아보지 않았지만 올림픽에서 3위 이내 입상하거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 병역면제가 따라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2002년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하면서 축구대표팀 선수들에게 병역 면제가 주어졌다.
당시 이것은 많은 논란을 낳았고 결국 이후로는 이러한 병역면제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지난 WBC 당시 야구 대표팀은 준우승을 하고도 병역면제를 받지 못했다.
법적으로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야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야구 대표팀이 못 받았으니까 축구도 안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이 논리도 허점이 있다.
나도 축구보다 야구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축구나 야구 등 인기있는 스포츠에만 그런 특혜를 적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오히려 인기있는 스포츠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 특히 국가대표급에서 그들은 어느 종목보다도 더한 지원을 받는다.
월드컵으르 개최하면서 세계적인 수준의 축구 경기장이 전국에 10개가 세워졌고 그들은 그곳에서 축구를 한다.
그들이 국가대표 경기라도 하면 수많은 스폰서가 붙어서 그들에게 필요한 자금과 용품, 심지어는 항공기 등 서비스를 제공한다.
우리는 김연아 선수가 자비로 코치를 고용했고, 자비로 대회를 다녔고, 자비로 용품을 구입했던 것을 알고 있다.
김연아로 인해 피겨가 인기있어지자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다른 비인기 종목에의 대우는 여전하다.
인기가 있고, 돈이 되는 종목의 선수들에게 이미 국가 차원에서도 많은 것을 지원하면서 +α로 병역면제까지 준다?
16강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국가나 협회 차원의 포상금이 쏟아질 게 뻔하고, 스폰서들도 포상금을 넙죽넙죽 갖다 바칠텐데 병역 면제까지 정말 대단한 특혜다.
대우에서 이미 많은 차이가 있는 비인기 종목 선수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더욱 커질 것이 뻔하다.

다른 한 가지 형평성의 문제는 규정에서 벗어난 사례, 예외를 남기게 되면 또 다른 예외를 부를 수 밖에 없다.
즉, 한 번의 예외로 인해 다른 예외가 꼬리를 물고 따라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예외를 적용하게 되면 규정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된다.
설사 그렇게 예외를 자주 적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외를 적용받은 쪽과 그렇지 못한 쪽의 입장은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결론을 이야기하자.
그들이 군대를 안가는 것을 배아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재능 있는 사람들은 군대에 가지 않고 자기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재능있는 사람은 많다.
글 쓰는 것도 재능이고, 음악을 잘 하는 것도 재능이다.
수학을 잘 하는 것도 재능이고, 분석을 잘 하는 것도 재능이다.
기계를 잘 다루는 것도 재능이고, 설계를 잘 하는 것도 재능이다.
세상에는 재능있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모든 재능있는 사람들에게 특혜가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앞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모두 형평성과 관련된 문제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에서 병역면제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도 특혜고, 면제가 아니더라도 체육부대에서 군생활 할 수 있는 것도 특혜다.
축구선수들이 인기에 따라 병역 면제를 받는 일은 없어야한다.
그들은 이미 많은 특혜를 받고 있다.
많은 인기 스포츠 선수들이 군 생활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어떻게 하느냐는 그들에게 주어진 유리한 조건을 잘 활용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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